레프 톨스토이 <부활 1,2>을 읽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너처럼 좋은 환경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라.
<위대한 개츠비>의 도입부에 나오는 문구이다. 왜 이 문장이 떠오를까?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공작이라는 귀족 신분이었기에 쓰여질 수 있던 작품이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주인공 네흘류도프에게 바로 톨스토이 자신을 투영하여 이야기를 풀어갔음을 깨닫게 된다. 부활! 나의 고등학교 모의고사 시험 중에도 가끔씩 지문으로 소개되었던 듯 싶다. 국어과목에서... 그래서 그런가? 내겐 읽었던 듯, 읽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부지기수로 들어왔던, 두 말할 필요없는 대작가의 명작인 <부활>을 2026년 1월이 저무는 때쯤하여 책을 읽고 그 흔적을 지면에 남긴다.
작품은 전체 3부로 나누고, 각각은 작은 chapter들로 구성하고 있다. chapter가 마치 각 영화의 Scene처럼 세밀하게 나뉘어 있다보니, 중간에 잠깐 중단하거나, 다른 용무를 본 후에 이어 읽기에도 편한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러시아 소설의 낯설음 중의 하나인 등장인물들의 이름만은 빈 노트에 적어가며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중간중간에 도입부에 나온 주요등장인물을 다시 들춰봐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리라. 물론, 이야기 속에는 색인된 주요등장인물외 더 많은 인명들이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하나의 이름에 여러개의 애칭이나 별칭이 있다보니, 간과하고 넘어가다보면 이야기의 맥을 잡지 못하고 헤매게 될 수 있으리라. 예를 들어,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 마슬로바'는 카튜샤, 카탸, 카튜하, 류보피, 륩카, 류바샤와 같은 애칭/별칭을 갖고 있다. 자, 이제 연필과 빈노트는 옆에다 두셨는가?
김나지움의 학생이었던 네흘류도프는 고모네 집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하고, 마침 고모댁의 하인 마슬로바에게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군대에 가고 점차 성인이 되어가는 그는 세상에서 사는 방식에 스며들어간다. 마슬로바와의 재회에서 육체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점령한 후, 세월이 흘러 이젠 그에게 남아있는 기억조차 없다. 그런 그녀를 우연히 살인사건의 법정에서 보게된 후, 네흘류도프는 새롭게 태어난다. 즉, 이전에는 무시하고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억눌린 자들이 보이고, 재판의 불합리성이 보이고, 상류사회의 위선이나 인간 삶의 불평등이 보인다.
부끄럽고 역겹다. 역겹고 부끄럽다.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고, 마슬로바와의 결혼을 계획하는 네흘류도프는 하나씩 실행에 옮겨간다. 그렇게 마슬로바의 잘못된 재판에 상고하고, 불합리한 재판의 희생양들을 돕고, 정치범들로 분류된 사회 제도적 부조리 등에 대해 눈을 뜬다. 더불어, 종교의 허례허식이나 그것을 믿어야 하는 사제들의 위선과 거짓을 본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또한 앞으로도 계속 있을 빈익빈 부익부, 불평등, 계급주의, 약탈, 핍박 등의 약육강식의 사회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대한민국에서 경험한 정치검찰의 행태를 보이기도 하고, 종교라는 양의 탈을 쓴, 소위 종교지도자들을 상기시킨다. 바로 그저께 발생한 ICE에 의한 Alex Pretti의 살해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리라. 신분적 혜택을 누리던 귀족이 하루 아침에 저 밑 하층민의 고뇌나 핍박, 사회적 부조리에 역겨울 정도이니, 이를 다시 태어났다 하지 않겠는가? 즉, 제목 <부활>처럼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교도소며 숙영지를 찾아가 면회를 할 수 있던 것, 마슬로바의 상고를 위해 상부 지도층에게 보낼 편지를 얻을 수 있던 것, 값 비싼 변호사를 고용하여 상고해 볼 수 있는 것, 자신의 명함을 건네면 지도층 대부분이 경솔히 대하지 않고 만나준다는 것, 마슬로바를 돕겠다고 올인을 해도 충분한 자금이 있는 점, 어디를 가도 삯마차를 타고 식사와 잠자리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점 등등... 이는 모두가 네흘류도프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가 공작이라는 귀족신분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이 글의 첫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네흘류도프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남이 갖지 못했던 신분적 특권이 있었기에 그가 하려했던 일, 즉 억울한 교도소의 징역수들을 돕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네흘류도프와 같은 신념을 가진 일반 평민층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돕고자 했을 때, 과연 그와 같이 도울 수 있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인 자들이 누리는 세상의 기득권은 이처럼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그 벽이 너무나도 높다. 이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 아니겠는가?
<부활>의 마지막 클로징은 어떨까? 네흘류도프 마음 속 어딘가에서 예전에 자신에게 익숙했던 음악이나, 식사, 또는 사교, 대화 등이 다시 그리워지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쇠사슬, 박박 깎인 머리, 구타, 타락, 죽어가는 크릴초프, 카튜샤와 그녀의 모든 과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이렇게 깨끗하고 우아한 행복이 부럽고 그리워졌다.
그리고, 마슬로바는 시몬손과 같이 살 것을 네흘류도프에게 말한다. 즉, 사랑하기에 네흘류도프를 놓아주기를 원하고, 그는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알고 있다.
그녀는 네흘류도프를 사랑했지만 그와 맺어짐으로써 그의 인생을 망치기보다 시몬손과 떠나 그를 의무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려 했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기쁘면서도 그와의 이별을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제 혼자가 된 네흘류도프는 숙소에서 복음서를 무심코 편다. [마태복음 18장]을 읽는다. 인간은 본래 죄를 갖고 있는 존재이기에 다른 인간을 벌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갖고 있는 법정의 모순이 해결된다. 그리고는 [마태복음 5장 21~48절]의 게율을 읽는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이다. 인간이 이를 실천하여 산다면, 인간의 세상은 천국일 것이고, 모든 인간은 최대의 행복을 누릴 것이다. 이는 우리의 주인이 그러라고 우리에게 준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래의 문장으로 글을 맺는다.
그날 밤 이후 네흘류도프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삶의 새로운 조건으로 들어가서가 아니라, 그때 이후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기의 그의 삶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는 오직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마치, 톨스토이가 말년에 기독교로 회귀하는 자신을 네흘류도프에게 이입시킨다. 그리고, 비로소 이전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살아갈 것임을 예시한다. 그렇게 '재탄생' 즉 '부활'함을 고백하고, 이후의 톨스토이 삶이 어찌될 지를 볼 것을 기약하며 글을 맺는다. 1899년 12월 16일의 날짜를 남기며...
나도 미국에서 정착하며, 10여년 이상을 기독교 교회에 다녔더랬다. 물론, 교인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친목을 유지하기도 하고, 목사와 장로와의 갈등으로 교회내 벌어지는 갈등도 경험했다. '믿음'의 진리보다는 '신앙'의 위선에 쌓인 '직분'의 경주였고, '추종'의 세기였고, '기도'의 허식으로 가득찼다. 목자인 목사보다는 직업으로써의 목사를 경험했다. 어느 한 종교-물론, 여기서는 기독교이지만-로 귀의하며 자신의 새로운 삶을 작품 <부활>을 통해 약속한 톨스토이를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나는, 이전에 철없이 펼쳤던 성경책을 다시 열어보기가 쉽지 않구나! 끝으로, 책을 읽는 동안 하이라이트로 표시한 몇몇 문장들을 남기며 글을 마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큰 어른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속이고 괴롭히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중략- 그들에게는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그들이 꾸며낸 것만이 신성하고 중요했다.
자신을 믿으면서 살면 항상 사람들의 비난이 따랐으나, 남들을 믿으면서 살면 사람들의 칭찬이 따랐다.
모두가 그렇듯 네흘류도프 안에도 두 인간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하는 정신적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을 위한 행복을 찾으며 그 행복을 위해 온 세계의 행복까지도 희생시킬 마음의 준비가 된 동물적 인간이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솔직함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을, 언제나 진실만 말하기로 결심했고 또 실제로 진실했던 것을, 그러나 지금은 온통 허위에, 그것도 주변 모두가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가장 무서운 허위에 갇히게 되었음을 생각했다. 허위에서 빠져 나갈 길은 없었고, 적어도 그에게는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허위에 더럽혀졌고, 허위에 길들여졌고 허위 속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살았고, 신과 선에 대한 말은 모두 기만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모든 의식이 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악의 신성모독이자 조소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사제)는 이러한 신앙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앙의 요구를 이행함으로써 지난 십팔 년동안 가족을 부양하고 아들은 김나지움에, 딸은 신학교에 보낼 만큼의 수익을 얻었기 때문에 이 신앙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놓이든 스스로 자기 일이 중요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도록 그 처지에 맞는 인생관을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해 선하다, 지혜롭다, 악하다, 어리석다 하며 하나로만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중략- 사람은 강과 같기 때문이다. 어느 강이나 물은 물로서 똑같지만, 좁고 물살이 빠른 곳이 있는가 하면 넓고 물살이 느린 곳도 있고, 맑은 곳이 있는가 하면 흐린 곳도 있고, 따뜻한 곳이 있는가 하면 찬 곳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토지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물이나 공기나 햇빛처럼 사고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땅이 인간에게 베푸는 모든 혜택을 인간은 똑같이 누려야 한다.
나쁜 행동은 나쁜 행동으로 가는 길을 낼 뿐이지만, 나쁜 생각은 가차없이 우리를 그 길로 이끈다.
정의나 선, 법률, 신앙, 신과 같은 모든 말이 그저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가장 조야한 탐욕과 잔혹함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야수성이 미적인 척, 시적인 척하는 너울 아래 숨어 상대에게 굴종을 요구하면, 인간은 그것을 신격화하면서 선악을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인간은 어떤 권리로 다른 인간을 처벌하는가?
일개 동물로 보더라도 그는 소방서장이 그처럼 화를 내며 아꼈던, 다친 밤색 수말 땨위보다 훨씬 더 완벽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지 않고 가축의 죽음만큼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서 사람들은 시체가 금방 부패할 테니 얼른 치워야 한다는 성가심과 번거로움만 느꼈다.
그렇다, 그 사람들, 소장도 호송병도 모두 원래는 온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맡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사악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사랑이야말로 인간생활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억지로 일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다.
당국은 마치 그물로 물고기를 잡듯이 그들을 잡았다. 그물에 걸린 것은 모조리 물가로 끌어올린 뒤 필요한 큰 물고기만 골라내고 잔챙이는 그대로 내팽개쳐 물 밖에서 말라 죽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그가 그동안 찾지 못하고 있던 답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했던 말, 즉 죄 없는 인간은 없으므로 인간을 처벌하고 교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언제나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이후 네흘류도프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삶의 새로운 조건으로 들어가서가 아니라, 그때 이후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기의 그의 삶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는 오직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1899년 1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