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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령 May 13. 2024

인연 좌표

낼모레 오십 시즌1

   결혼생활 21년... 갱년기가 시작되었다. 없던 것이 생기는  사춘기와  있던 이 사라지는 갱년기 중에서 신경질적인 화가 많아지는 갱년기다.  몸은 자주 아프고  쉽게 낮지  않는다. 오래 사용해 낡은  몸의  장기들과 관절들을 치료하며  몸에  없던  수술 흉터들이  생기기도 한다.

익숙했던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내 기분에 따라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긴 시간 서로의 베개를 가까이하고 자던 남편의 숨소리에 잠들 수 없는 날들이 많아지기 시작하고, 남편의 코골이 소리는 천둥번개 마냥 내 에 크게 들리고  머리카락이 위로  솟고 두피가 생선 비늘이 칼날에 세워지는 것처럼 뒤집어진다고 느꼈다. 자고 있는 남편의 뺨을 후려 치고 싶은 심정을 겨우 참고  남편을  깨워 ,

“오빠, 돌아누워! 오빠 때문에 잠을 못 자겠어.”

라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참을성을 담아 말한다. 등 돌려 돌아누운 남편의 코골이 소리가 잠시 조용해지면 ‘빨리  잠들어라.  지금 어서 자야 해. 자야 해. 빨리’하며 간절히 기도하며  주문을  외운다. 출근하고 운동도 하고 있어 몸은 분명 피곤할 텐데, 잠들기가 매번 힘들고 고통스럽다. 빈 방이 없어 그렇게 한 1년을 보냈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 자고 있는 남편의 뺨을 진짜 때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시기에 다행히 큰 아들이 군대의  부름을 입대했다. 큰 아이가 집을 떠난 그날  바로 남편과 각방 체제로 들어갔다. 효도도 이런 효도가 없다.  나와 고양이 두 마리가 쓰기엔  아주 넉넉한 퀸 사이즈 침대는 매일매일이 왕실의 금침 이불이 된다.


   갱년기가  시작되며 조금의 거슬림도  순간 참아내기가 힘들어졌다.

 나의 몸속에서 시작되고 있는  사라짐과  바깥공간의 사라짐이 손수레 바퀴처럼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4명의 식구 중 아들 한 명은 군대로 , 둘째 아들은 두 달 전 독립 하겠다며 선언하더니 진짜 1월에  독립했다. 아들들이  내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남편과 가게 운영을 교대로 하다 보니 일상적인 만남은 평일엔 하루에 10~15분 정도다. 내가 오후 늦게 출근해서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남편은 큰  코골이를 하며  숙면 중이다.  고양이 두 마리가 꼬리를 세워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다리에 자기네 몸을 스치며  나와 시선을 맞춘다.

“야옹. 야아 옹”     


   결혼 생활 중 나의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식사준비와 뒷정리는 식구가 줄면서  간헐적이고 간소화되었다.

 가족들을 향하던 시간은 나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 쯤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활동 중 하나가 되었다. 세금보다 더 규칙적이던 아들들의 학원비 납부가 끝났다. 아이들의 학원비만큼 매달매달 저축을 했다면 상당한 금액을 모았겠지만, 우리 부부에겐 돈이 모으지 않았고, 대신 주말마다 행복하게 놀러 다니며 그동안  참았던 소비를 즐기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경치가 좋은 카페를 방문하고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도 부지런히 다니고, 맛있다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은 취미를 시작해 배우고 있다. 처음 남편이 골프를 배운다고 했을 때, ‘골프를  한다고? 그럼, 나도 같이 해야지.’라며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잔디에 돈을 쓸데없이 뿌려야 하는 골프를 남편이 한다고 했을 때, 정말 못마땅해서 남편 발목 잡기로 던진 말이었다. 한 달 두 달 골프 레슨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내가 더 재미나게  배우는 레저가 되었다. 남편이나 나나 바닥에 가만히 있는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우리는 레슨 프로님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남편과 나는 가게에 오는 진상 손님을 욕하고, 서로의 지인들을   평가하며, 아들들의 괘씸한 행동에 열 올려 시원스레 한다. 늘 남 뒷말을 하고 나면  불안해서 보험처럼 하는 이런  얘기 딴 데서 절대 말하면 안 . 알지?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잖아.  다른 사람들 한텐 절대  비밀이야. 알았지?”라는  약속도 할 필요가 없다. 뒷말하기  가장 좋은  파트너는 부부다.  탈 날 걱정이 없으니 수많은 말을 쏟아내고도 맘이 편하다. 22년이라는 오랜 결혼생활은 내게 친구 같은 남편을 선물했다.


   겁 없이  웨딩드레스 입은 나와 철없이 내 손을 덜컥 잡은 남편은 신혼 초 피 터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말다툼을 하면 각자의 입장을 A, B, C의 경우로 예를 들어가며 상대방에게 쏟아 내기만 했다. 남편의 말을 듣고 있다가  허점을 잡아내기 위해  얼마나 초집중했던가! 결혼과 동시에 계획하지  않았던 허니문 베이비를 임신한 나는 감정이 늘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올라오는  열 채임으로 오만가지 말들을 나만의  정확한 논리로 남편에게 쏟아내며  승리의 깃발을 차근차근  하나씩 꽂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겼다고  생각하는 나도 육체적 피로감이나 감정적 상처는 깊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폴레옹처럼 영토를 확장하는 싸움도 아니고, 인종차별 같은 대의명분이 있는 싸움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의를 다해 임했나 싶다. 시간이 엄청나게 흐른 지금은 몇 개의  사건들 말고는 싸움에 대한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그렇게 날카롭고 소란스럽게 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그 시절 서로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서로에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저 받아들이기  힘든  각자의 기준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식성과 여가 시간의 활용법, 위생 관념, 인간관계  형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함께 한 시간 속에  비슷한  기준이 생겨나기도 하고 아주 먼 가치관의 차이가  예전보다는 좁아졌다는 변화가 생겼다.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어, 덜  상처 주고, 함께 맞추어 가기가 예전보다 수월 해졌고, 서로가 표현하는 언어의 공통점이 많아지면서 숨겨진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쉬워지고 소통의 흐름이 쫄쫄쫄에서 쭈르륵을 지나 가끔은  콸콸콸하고  속 시원할  때도 있다. 좀 더 많은 이해가 생기고 배려가 잦아지며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모난 부분도  슬쩍 넘어가기가 젊은  날보다  평온해지는 단계가 오니 아이들은 훌쩍 커 성인에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있었다.


   20대.

청춘이라고 불리던 시간 속,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인연의 좌표 중에 지금의 '남편이 아니면 안 된다.'는 확고함은 없었다.

“내 사랑은 이 사람뿐이다.”

라는 생각보다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라는 느낌이 있었다. 남편 또한 내가 유일한 인연의 좌표는 아니었다. 나 보다 나이가 많은 남편에겐 결혼까지 생각한 가슴 아픈 깊은 인연도 있었고,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다가 올 새로운 인연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을 때 가깝게 “또렷이 보였던 좌표가 나여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린 서로에게 틀린 좌표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죽음의 마지막 시간까지 아름답고 편안한 종착지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제는 확신이 선다.

“나는 지금의 남편이 아니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믿음을 가질 만큼 남편의 노력이 많았다. 언제나 나를 우선적으로 생각해 주는 그의 지난 모든 몸짓과 현재의 수고스러움에 감사하며 행복하다. 남편과 점을 보러 가면 늘 점을 치는 분들은 얘기한다. 남편의 수명이 길다고. 얼마나 다행인지. 남편이 없는 시간 속에 남겨지는 아픔보다 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 나는 편하다. 내 생애 마지막 순간 눈에 담아 보는 것이 남편의 정든 얼굴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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