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소리가 그대의 길을 인도할테니
소리는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고 한 막의 삶을 살아간다. 그 삶에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리의 삶은 인간의 삶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소리의 날실과 삶의 씨실로 촘촘히 짜여져 한 폭의 인생이 된다. 인생의 궤도는 소리좌표를 따라 순행한다. 좌표는 네 개의 축으로 존재하며 사계절을 이룬다.
봄의 소리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설레고 희망차다. 긴 잠에서 깬 개구리의 청아한 울음소리는 겨우내 얼어붙은 우주의 모든 원소를 깨운다. 봄을 알리는 작은 척삭동물의 구령에 맞춰 산들바람 불어오면 나무는 서둘러 연초록빛 새순을 틔우고 애기나리는 신이 나서 올망졸망 꽃망울을 터트린다. 꽃이 피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봄의 소리는 유독 주파수가 낮은 까닭에 물리적 청력으로는 좀처럼 듣기 어렵다. 봄이 전해주는 미세한 소리 공명을 마음으로 느낄 뿐이다. 만물이 숨죽여 하나둘 소생하면 우리네 마음에도 만 가지 소리진동이 울린다. 어서 일어나 미지의 꿈에 호기롭게 도전하라고.
여름의 소리는 박하사탕처럼 청량하고 폭죽처럼 격렬하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매미의 맹렬한 울음소리는 태양을 뜨겁게 달군다. 여름을 몰고 온 작은 곤충의 호령에 맞춰 만물도 일제히 울림대의 주파수를 높인다. 나뭇잎은 짙은 초록빛으로 물들고 장미꽃은 붉게 타오른다. 한 철 살이 매미는 목숨같이 울어 대고 작달비는 가열하게 퍼붓는다. 노대바람 휘몰아치면 성마른 파도는 자비 없이 범람한다. 절정에 다다른 소리는 마침내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는 심장처럼 박동한다. 망설이고 있는 일이 있는가. 여름의 에너지를 수혈하라. 생각이 실상이 될 테니.
가을의 소리는 모닥불처럼 소박하고 낭만적이다. 엽록소를 상실한 나뭇잎 떼의 소용돌이가 갈바람 따라 거리를 배회하다 찢기고 밟혀 영혼처럼 울어대면 프랑스 시인 구르몽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내게 상냥히 물어온다. ‘시몬, 너는 아느냐 가을의 낭만을’. 낭만과 그리움은 한 짝이었던가. 깊은 가을밤, 풀숲에 앉은 풀벌레가 ‘그립다 그립다’ 소리 내어 울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잔상이 내남없이 찾아온다. 그 시절, 친구들과 무작정 떠난 치기 어린 무전여행은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가을이다.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 반짝이는 별들과 캠핑 랜턴의 불빛을 옴실옴실 싸고도는 나방들의 신경 쓰이는 날갯짓과 히치하이킹으로 물색없이 얻어 탄 트럭 짐칸에서 목이 쉬도록 질러댔던 우리의 떼창 연가가 귓가에 선연히 들려온다. 풀벌레 소리를 들을 때면 언젠가 꼭 한번 다시 불러 보고 싶어 진다. 그 시절 우리가 아니어도, 그 트럭의 짐칸이 아니어도 좋다. 마음껏 눈치 없이 마냥 불러보고 싶어 진다. 가을 같은 중년의 우렁찬 떼창 연가를.
겨울의 소리는 등대처럼 호젓하고 애잔하다. 가을 낙엽이 떠나버린 공허한 거리는 차가운 중력에 눌려 무겁게 침잠된다. 겨울을 마주한 만물은 그저 침묵하며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려 들지 않는다. 얕은 호흡과 짧은 보폭으로 길고 긴 겨울을 보낼 뿐이다. 겨울 칼바람의 소슬한 경적이 묵직하게 진동하면 바다는 성난 맹수처럼 돌변한다. 맹수를 마주한 등대는 마치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같은 작태다. 그렇다고 필사의 무기 하나 가진 것이 없다. 그저 어두운 밤바다를 해의 등불처럼 밝히며 살가운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할 뿐이다. 그 가냘픈 섬광은 끝내 바다의 거대한 암흑을 부수고 노곤한 어부의 곰삭은 근심을 달래리라. 기필코 맞이할 봄의 희망을 위해.
계절을 통해 인생을 본다. 우리 삶에도 계절은 지나간다. 인생의 계절은 자연의 계절과 다른 궤도로 운행한다. 자연의 계절은 오고 가지만 인생의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눈비 내리는 날에 여우볕 쨍하게 뜨고 여린 꽃망울에 찬서리 내리니 봄인 듯 가을을 살고 겨울인 듯 여름을 산다. 계절은 저마다 다른 주파수로 우리 삶을 이끈다. 봄의 희망은 아름다운 도전을 부추기고 여름의 열정은 운명을 바꾼다. 가을의 낭만은 인생을 돌아보게 하고 겨울의 침묵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도약대가 되어 준다. 갈길 잃은 그대여. 지금 이 순간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소리가 그대의 길을 인도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