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의 반란

여전히 아름다운 학교

by 아빠쌤

어느 가을 저녁, 학교운동장에서 일어난 기적이야기입니다. 언더독(Underdog). 투견 싸움에서 '밑에 깔린 개'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이길 확률이 적은 약자를 의미합니다. 어제 우리 학교 운동장에서 이 언더독들의 행복한 반란을 목격했습니다. 아니, 함께했습니다. 매년 교정에 은행 열매가 눈처럼 쏟아지는 계절이 오면, 우리 학교에서는 반별 축구 대회가 열립니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수행평가 시즌을 통과하는, 만만치 않은 시기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때 아이들의 눈빛이 가장 빛납니다. 축구장에서도, 응원석에서도 말이죠.


어제 6교시였습니다. 개별 상담을 하며 10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과목별 밸런스가 안 맞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동지애를 자극하며 학습 계획을 공유하도록 했더니, 삼삼오오 모여서 심각한 듯 떠들어댑니다. 무거운 성적 이야기는 가벼운 일상 얘기처럼 흘러갑니다. 때로는 아이들에게 무거운 내용일수록 가벼운 일상처럼 이야기하도록 합니다. 저는 모든 아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무섭게 해내는 잠재력을 믿거든요. 그리고 매년 목격하고 마주하고 놀라곤 하는 것이 제 믿음의 확신입니다.

그런데. 제일 뒤쪽 자리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책상 위에 축구 경기장을 그려놓고, 제 눈치를 보며 전술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다가가자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말합니다.

"선생님, 축구 잘 아시잖아요. 저희 좀 도와주세요." 진지한 눈빛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습니다.

"어? 너희들 포메이션 하고 전술 브리핑해 봐."


그 순간부터 펼쳐진 아이들의 설명은 놀라웠습니다. 상대팀의 예측 포메이션에 따른 우리의 대응 전술, 세부 포지션별 역할까지. 그냥 프로팀 감독이 따로 없었습니다. 현대 축구의 키워드가 모두 있었습니다. 빌드업, 압박, 스위칭, 유기적 플레이, 창의적인 플레이까지. 수비와 공격의 모든 요소가 집결되어 있었죠. 그래서 저는 한 가지만 추가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고등학교에 오래 근무하다 보니 선수급으로 축구를 잘하는 아이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축구는 단체 시합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들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입니다. 상황에 따라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아이들은 많지 않거든요. 상대팀에게 자신감을 빼앗기지 않는 것.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러면 아이들은 축구장에서 날아다니며 자신의 기량 이상을 발휘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여러 번 봤습니다. 상대는 강팀이었습니다. 개인 기술은 물론 조직력까지 우승팀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경기 전까지 다들 우리 반이 몇 골을 먹을지 걱정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저는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선수비 후 공격. 절대 실점을 이른 시간에 허용하지 마라.'

'수비수들은 절대 필드 안쪽으로 패스하지 마라.'

'양쪽 윙포워드는 수비 가담을 확실히 해라.'

'상대 에이스는 협력 수비로 막아라.'

'공격은 가성비에 방점을 찍어라.'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이미 우린 첫 번째 경기를 이겼어. 이제 즐기는 거지. 이번이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뛰자!'


마무리하고 보니, 축구를 뛰지 않는 반의 나머지 아이들까지 모두 모여 제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경기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약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이런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축구 시합의 승리보다 더 큰 경험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반'이라는 느낌. '함께'라는 느낌. '원팀'이라는 감정.

벌써부터 이 아이들과의 마지막이 아쉬워졌습니다.

저녁 6시, 잔디구장에 불이 켜졌습니다. 시합 시작 5분 전. 미리 사둔 음료수를 들고 연습하는 아이들 앞에 섰습니다. 저녁을 먹지 않고 뛰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저녁을 패스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보고 있습니다. 담임 선생님의 하나하나 모두를 말이지요. 아이들과의 관계도 어른과의 관계와 닮았습니다. 작은 디테일이 사람을 가깝게 만들고 멀어지게 하는 것은 똑같으니까요. 다치지 않게 몸을 푸는 모습을 챙기고, 연습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습니다. 혹시 마지막 경기일지 모르니, 나중에 "네가 연습할 때 이랬더라" 얘기해주고 싶었습니다. 시합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더 멋지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니까요.

시작하기 전, 자기들끼리 모이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선생님, 저희 파이팅 같이 해요!"


그 순간 저는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힘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하며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이미 너희들은 내 마음에 우승팀이다.'


킥오프. 역시나 상대팀의 공격진은 대단했습니다. 발재간도 좋고, 시야도 넓고, 공에 힘이 실려 뻥뻥 잘 걷어 올렸습니다. 아이들의 긴장한 눈빛을 보니 저도 덩달아 긴장됐습니다. 그런 저에게 지나가던 3학년 아이들이 "저, 선생님 반 응원할게요!"라고 말하는데, 왜 그리 고맙던지요. 계속 밀리면서도 상대팀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내며 버텨내는 아이들. 전반전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 게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골을 먹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아이들의 눈빛과 움직임에서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축구든 공부든 일이든, 실낱같은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생기면 그걸로 끝입니다. 이미 그건 졌어도 이긴 것이고, 실패했어도 성공인 거죠. 전교생의 감탄을 자아내던 상대팀의 창과 같은 날카로운 공격을 무실점으로 막고 전반전을 마무리했습니다. 쉬러 들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행복했습니다. 치열하게, 쉬지 않고 뛰느라 땀범벅이 된 아이들.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에게 음료수를 건넸습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안도감과 동시에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휴식 시간이 끝나갈 무렵, 아이들에게 말을 던졌습니다.

'전반전은 무실점이니까 우리가 이긴 거야. 후반전은 체력 싸움이고, 내가 한 발 더 뛰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너무 학교 선생님의 교과서 같은 잔소리처럼 들려서 혼자 머쓱했습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아무 이해관계 따지지 않는 담임 선생님의 교과서 같은 잔소리가 필요할 때가 있겠죠.


후반전이 시작됐습니다. 어둠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계속 수비를 견고하게 했지만, 상대의 공격은 여러 차례 가슴 철렁한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서서히 시간이 흘러가고, 상대팀 아이들의 불안과 조급함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우리 반 아이들이 서서히 들뜨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소리쳤습니다.

"아직 경기 안 끝났다! 경기에 집중해!"


축구를 좋아했지만, 난생 이렇게 진지하게 코칭했던 순간은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아이들을 응원하며, 이 감동의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죠. 그런 찰나. 제 앞에서 우리 팀이 프리킥 찬스를 얻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났던 첫 순간처럼 '지금 이 순간이다'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날은 더욱 어두워졌고, 라이트는 충분히 밝지 않았습니다. 상대팀 골키퍼는 '설마 저기서 공이 날아올까?' 하는. 키커의 모습도 어슴푸레한 거리. 우리 반 키커의 킥력과 스타일을 알고 있던 저는 그 아이에게 비밀스러운 손짓과 함께 조용히 말했습니다.


"도진아, 때려!"


그 아이는 눈으로 대답했습니다.

"예, 선생님! 해보겠습니다."


다행히 킥은 골대 방향으로 잘 날아갔습니다. 워낙 거리가 있다 보니 공이 크로스바를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하던 순간. 갑자기 필드 안팎의 함성이 터졌습니다. 골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극장골! 우리 팀 아이들은 정신줄을 놓았고, 상대팀 모습에서는 비현실적인 허탈함이 보였습니다. 정신없는 우리 팀 아이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수비에 집중해!"

실은 상대팀 아이들도 정말 멋진 아이들입니다. 한 명 한 명 수업 때 즐겁게 보내는 아이들인데, 괜히 미안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여러 번의 위기를 겪으며 경기가 끝나갈 무렵. 제 옆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말합니다.

"이거 진짜임? 이게 이렇게 된다고?"

"와, 나 진짜 국대 경기도 안 보는데 이걸 끝까지 보네. 대박!"


여기저기서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하던 우리 반이 이기는 모습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오히려 실망할 절대강자 상대팀을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의 그 순간처럼

마지막 휘슬이 울렸습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쭈뼛쭈뼛 서로 눈치 보더니, 한 아이가 저를 향해 달려오자 나머지도 모두 함께 달려왔습니다. 어깨동무를 하고 승리의 감격을 나눴습니다. 땀에 젖은 아이들과 뒤엉켜 지른 기쁨의 함성이 가을밤의 어둠을 뚫고 별똥별처럼 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그 순간, 2002년 월드컵 16강 한국-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달려가던 장면이 오버랩됐습니다. 예선 한 경기였지만, 절대강자 포르투갈과 약자 한국의 경기에서 넣은 선취점. 그것은 단순히 한 경기가 아니었죠. 그날 저녁 우리 반 아이들은 태극전사였고, 저는 히딩크였습니다.

요즘 학교를 향해 날 선 불신의 시선이 날아옵니다. 공교육은 무너졌다는 실망스러운 기사가 마치 공공연한 사실처럼 전해집니다. 하지만. 불신과 실망의 시선 그 속에서도, 학생과 교사들은 여전히 아름다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학교는 여전히 살아있는 거죠. 학교에서 사회를 경험하고, 친구들에게서 평생을 함께할 벗과 동료를 만납니다. 학교는 성적과 진학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목표를 향해 자발적으로 학급 리그(G-one league)를 만들어 한 학기 동안 전술을 준비했습니다. 부족한 실력을 채울 방법을 공유하고, 필요하면 용기 내어 도움을 요청할 줄도 알게 됐습니다. '언더독'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에 힘들었지만, 그래서 약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축구도, 학업도, 인생도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의미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바랍니다. 축구공이 둥글듯 인생에도 역전승이 있고, 우리는 강자가 될 수 있다면 언제든 약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약자로 머무르란 법은 없다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가슴과 머리로 기억하길말이죠. 미래에 멋지게 날아오를 아이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학창 시절을 이렇게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제가 아직 교직에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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