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연습하는 교실

성적표에는 적히지 않는 진짜 인생 이야기 ③

by 아빠쌤

시계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가방 속에 있던 먼슬리 다이어리가 떠올랐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기록이라 아이들 앞에 펼치기가 잠시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일 년 동안, 몸으로 마음으로 함께 부딪히며 지낸 아이들이라 조금은 솔직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계속 연습 중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나만의 연말 리추얼

기말고사가 끝날 무렵, 12월 중순쯤이 되면 저에게는 작은 연말 리추얼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써온 먼슬리 다이어리를 천천히 다시 넘겨보는 일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듯

예습하고, 수업 듣고, 복습하듯 저도 제 삶을 그렇게 다뤄보려 합니다.

계획했던 것, 지켜낸 것, 지키지 못한 것까지.

먼슬리 다이어리는 저에게 한 해를 복습하는 노트이자 다가올 시간을 예습하는 도구입니다.


학습 플래너는 인생 플래너의 연습이다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꾸준히 잘했던 아이들 대부분은 학습 플래너를 썼다고.

공부를 잘하고 싶다면 무조건 플래너를 써야 한다고 말하자 아이들 눈빛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나에게 이 먼슬리 플래너는 너희들의 학습 플래너와 같다고.

내 인생의 방향을 자주 확인하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쓰는 거라고.


조심스럽게 다이어리 속 일부를 보여주자 아이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인생에는 성적 말고도
이렇게 중요한 것들이 많네요?


지금은 연습하는 시간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은 성적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질 거라고.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성적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고.

그래서 지금은 학습 플래너로 인생 플래너를 연습하는 시간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학교와 교실은 바로 그런 연습을 해도 되는 곳이라고.

학습 플래너를 쓰다가 옆의 빈 공간에 하나씩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공부 말고 자기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것들.
방향, 태도, 꿈, 혹은 아직 이름 없는 마음들.

그 순간 학습 플래너는 조용히 인생 플래너가 됩니다.


시간을 산다는 것

시계가 인생의 주도성을 의미한다면 플래너는 그 주도성을 실제로 살아보게 하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은 분명한데 일상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럴 때 다시 방향을 확인하게 해주는 것,
나침반이 되어주고 지도가 되어주는 것이
저에게는 이 작은 플래너였습니다.


마음으로 사는 시간

수행평가와 시험, 학생부 준비가 몰아치는 학기 중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쉽게 닿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해의 끝자락이라서였을까요.

아이들의 눈빛은 그날 유난히 조용하고 깊었습니다.


이호선 님의 책 '오십의 기술'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나이로 살지 않고 마음으로 산다.

그 문장을 떠올리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나이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살고 있구나.

아이들에게 내 마음을 건네고, 아이들의 마음을 듣고 있으니까.


오늘도 교실에서 배웁니다

내 말속에 날카로움 대신 공감이 담겨 있었는지,
아이들의 말속에서 나는 무엇을 읽고 있었는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눈 날의 끝에는 늘 하루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스물두 명의 아이들 덕분에 정말 마음이 풍성한 한 해였습니다.

조용히, 아주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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