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해야 사랑인가?
사랑한다는 말을 시켜서 한다.
대한민국 30대 남자에게
'사랑한다'라는 사랑스러운 표현은
(구)여친 + (현)와이프에게만 쓰는 말이 분명하다.
아! 그나마 대학생 때
사랑을 외쳤던 적이 있었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교수님 사랑합니다~"
술 한 잔에 호기롭게 외치던 사랑말이다.
사랑, 꼭 표현해야 아는가?
우리내 아버지들은 사랑에 대한 표현에 인색하다.
그들은 IMF를 함께 극복하고,
회사를 목숨처럼 생각했으며
안사람, 바깥사람을 나누고
마음을 월급날 치킨으로 표현하던
무뚝뚝함의 대명사니까.
내가 봐온 아버지가 그랬고, 3년 전까지도 그랬다.
그랬던 아버지가 와이프와의 통화 끝에
"아버님 사랑해요~"
"어~ 사랑해~"
충격 200%
영화 '킹스맨'의 명대사가 생각났다.
"매너가 사람을 바꾼다."라고 했던가
가끔은 사랑이 사람을 바꾼다.
고모들도 마찬가지다.
막내 고모는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아직까지 사회생활을 하는 그랜드커리어우먼이다.
그래서 그런지
감성보단 이성이 먼저고
뭐 하나를 해도 확실하고
되는 거, 안되는 거 확실한
똑부러진 사람이다.
어느날 막내고모와 약속잡을 일이 생겨
평소처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늘 '용건만 간단히'니까
"28일 날짜 괜찮으셔? 어 어 알겠어 고모~"
전화를 끊으려하자 와이프가 옆구리를 콕콕찌른다.
입모양을 자세히 본다.
'사. 랑. 해.'
세 글자를 턱으로 휙 밀어내며,
내 머리에 입력한다. 그대로 입이 출력한다.
"어 고모 그리고 있잖어. 사랑해"
"뭐야 이 자식아~ 나도~ 사랑해~"
평생 들을 일 없을 것 같던 말을
내 귀로 직접듣다니...
그랜드커리어우먼...
우리 막내고모가...? 이런 말을?
둘째 고모도 마찬가지다.
통화의 마지막엔 늘
'싸랑해요~' '오늘도 햅삐~'를 외치는
수다쟁이에, 사랑꾼 둘째고모.
우리 친척과 가족들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말수가 적고 대체로 무뚝뚝하다.
무뚝뚝한 그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애교가 탄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둘째고모, 우리집의 분위기메이커임은 확실하다.
그녀는 가족을 참 사랑하고, 그만큼 표현을 잘한다.
다만, 표현을 받아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아버지와 막내고모가 엄청나게 무뚝뚝할 뿐.
그럼에도 둘째고모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그 사랑꾼 둘째고모가 아팠다.
많은 표현과 많은 말만큼 활동량도 많았던 그녀는
본인의 건강을 엄청난 자랑으로 여겼는데
어느날부터 몸이 아팠고, 암 진단을 받았고
생전 처음 입원에 수술까지 하게 됐다.
둘째고모의 두 동생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걱정했다.
아버지와 막내고모.
입원수속을 밟아주고, 로비에서 한참을 기다렸고,
수술 경과를 궁금해했고, 밥을 함께 먹었으며, 퇴근 후 집대신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둘째고모는 감사를,
막내고모는 소중함을 표현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은 안했지만,
그 사랑을 꾸준한 노력으로 대신했다.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부부는 가족에 대해 더 많은 얘길 한다.
'더 잘해드려야되는데'
'핑계만 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말을 할 때면 어른들의 나이를 역순으로 계산해본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면, 아버지는 고모는 몇 살일까?
그 아이가 10살이 되면, 장모님, 장인어른의 건강은 어떨까?
아이와 우리의 소중한 가족들이
함께할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여전히 난 사랑의 표현을 시켜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시키면 잘한다.
"사랑한다고 말씀 드렸어?"
"빨리 사랑한다고 해!"
"안아드려!"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보통 아내의 빌드업이 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그들은 들을 준비를 하고,
이미 웃고 있으니.
그래서 오늘은
뜬금없이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들의 표정이 궁금하다.
놀랄까? 더 좋아할까?
둘째고모는 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감정을 잘 적어두자.
그리고 만나면 이야기하자.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