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이 풀지 못한 시장의 비밀 -마이클 셔머-
QWERTY 신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폴 데이빗 교수는 QWERIY 설계의 중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완벽한 선물 시장이 부재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그릇된 시스템을 조급하게 표준으로 삼도록 만든다. 이 잘못된 시스템은 차후에 중구난방의 정책 결정이 이뤄지는 경우, 그 와중에서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게 된다."
1873년 크리스토퍼 숄스는 레밍턴앤선스사에 자신의 타자기와 쿼티 자판을 팔았다. 그리고 1882년 롱리가 속기타자연구소를 세웠는데 이곳에서 쿼티 시스템을 채택해 널리 보급했다. 그리고 쿼티자판기를 소유한 레밍턴사도 타자학교를 세워 쿼티를 보급했다.
1988년 롱리의 쿼티 키보드와 경쟁자인 루이스 토브의 방식이 속기 대결을 펼쳤다. 쿼티 자판기의 대표로 나선 롱리의 제자 프랭크 맥거린은 쿼티 자판기를 다 외워서 자판기를 보지 않고 타자를 치는 기술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맥거린의 승리이후 미국 타자수들은 무조건 쿼티 자판기를 선택했다. 이제 쿼티 자판기가 아닌 다른 배열의 자판기를 상품으로 내놓으면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쿼티 자판기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자판기의 보급이 초창기 였던 점, 그리고 프랭크 맥거린의 개인 타자법(자판을 외워서 치는 방식)이 훌륭했던 점 때문에 높은 보급률을 기록한 것이지 쿼티 자판기의 배열이 효율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쿼티 자판기의 시스템은 너무나도 견고했고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기에 동시에 모든 회사와 타자수들이 쿼티 자판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다른 배열의 자판기로 대체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니 비효율적인 배열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쿼티 자판기를 사용했다.
1936년 어거스트 드로박은 간이 자판을 만들어 특허 등록했다. 그가 만든 간이 자판은 쿼티 자판보다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외면을 받았다. 드로락식 자판을 배운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많은 회사들이 드로락식 자판을 만들어 팔 수 없었다.
많은 학자들은 쿼티 자판의 성공을 경로 의존성으로 설명했다. 산업 초창기에 자리잡은 시스템은 가장 효율적이지 않더라도 바꾸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국가나 회사, 그리고 사회에서 이 같은 경로 의존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이 사용하는 단위가 국제 단위와 달라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지만 쉽게 바꿀 수 없는 것 역시 경로 의존성의 하나다.
아파트의 크기를 말할 때 우리는 몇 평이라는 단위에 익숙하다. 산업자원부는 평, 인치, 자, 근 ,돈 등 비 법정 계량 단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평에 익숙하다.
그럼 경로 의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정말 효율적인 대안이 있다면 왜 바꾸지 못하는 걸까?
경제학자 스탄 리보위츠와 스티븐 마골리스는 쿼티 자판에 대비해서 드보락 자판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연구했다. 그들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쿼티 자판은 최적의 시스템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경쟁자들보다 못하지도 않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업무 수행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즉 더 효율적인 대안이 있어도 현재 실행중인 방식에 큰 문제가 없고, 유의미하게 차이나지 않는다면 경로 의존성을 버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 존 내시는 내시 평형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둘 혹은 그 이상의 참가자들이 어떤 평형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 지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방적으로 전략을 변경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만일 모든 참가자들이 각자의 전술을 선택해서 고수하는데, 그 중 어떤 참가자 하나가 단독으로 전술을 바꾸었는데도 아무 이익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면, 이런 전술적 선택의 결과를 일컬어 평형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이 다. 이를 경제학에 적용하면 시장이 평형 상태에 이르면 그때는 전략을 바꾸지 않고 고수하는 것이 보다 이익이다(최소한 그렇게 생각된다).”
큰 이득이 주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현재의 방법을 고수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의미다.
투자에서 경로의존성은 자칫 큰 파멸을 불러오기도 한다. 레이달리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투자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최근 일어난 일이 한동안 계속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얼마전 투자에 성공했다면 같은 투자로 또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높은 수익을 안겨준 자산은 이미 비싼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좋은 투자가 아니라 나쁜 투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앞서 살펴본 쿼티 자판에 경로의존성이 생긴 탓은 쿼티 자판 자체의 효율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시 평형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큰 이익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인 파레토 역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했다. 그는 거래는 네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말했다.
승승 - 양측 모두 이익을 얻는 상황
승비패 - 한쪽은 승리(이익)를 얻고, 다른 한쪽은 최소한 손실은 입지 않는 상황.
승패 - 한쪽은 승리(이익)를 얻고, 다른 한쪽은 손실을 입는 경우.
비패패 - 한쪽은 손실을 입고, 다른 한쪽도 손실을 입거나, 양쪽 모두 손실을 보는 상황.
파레토는 거래기 승승 혹은 승비패의 상황에서만 이뤄진다고 말했다. 누군가 손해를 본다면 기존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투자를 하면서 경로의존성에 빠지는 이유 역시 이 방식이 최소한 손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투자시장은 정말로 예외적인 상황이 많기 때문에 손해를 지속적으로 입으면서도 같은 방식을 고수하는 투자자가 존재한다. 이런 투자자 유형도 일종의 경로의존성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주식이 비쌀 때 매수하고 쌀 때 매도하는 유형이다. 이 부분은 다른 이유보다 인지편향적 문제 탓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고, 오늘 살펴볼 문제의 경로의존성은 적당한 이익을 취하는 유형이다.
적당한 이익을 취하는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앞에서 살펴봤듯 사람은 이익을 취할 때의 방식을 바꿀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자신의 저서 “엔트로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선 수렵 채취사회가 충분한 잉여를 축적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가면서 불확실하고, 위험하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밭 갈기를 시작할 것인가? 모든 것이 잘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양식을 결코 바꾸지 않는다. 완전히 미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인간이 수렵채취를 포기하고 농업으로 전환한 이유가 정말 미쳤기 때문일까? 제러미 리프킨은 필요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어떤 투자자가 제법 괜찮은 수익을 내는 투자법을 고안했다고 해보자. 그가 충분한 수익을 안겨주는 투자법을 내버려두고 다른 투자법으로 투자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벌어두었던 수익이 잉여금으로 남았기 때문일까? 놀랍게도 어느정도 맞다.
자본금이 부족할 때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집중투자가 필요하다. 집중투자에 맞는 투자법이 있다. 그 투자법을 통해 수익을 올렸다면 이제 슬슬 자본을 지키는 방식의 투자로 전환한다. 이때 집중투자에서 분산투자로 전환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투자자가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한계효용은 각 개인마다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평생 먹고살 걱정이 없을 만큼 큰 돈을 번 사람이 무리한 투자로 모든 것을 잃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당신의 투자법이 쿼티 자판기라고 해도 시장은 쿼티 자판기 사용자처럼 어느정도의 효율로 지속된 수익을 주지 않는다. 시장은 끊임없이 변한다. A라는 투자법이 A1의 시기에는 훌륭하게 들어맞지만 A2의 시기에는 처참한 수익률을 안겨주기도 한다. B라는 투자법은 A1의 시기에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A2와 A3시기에 좋은 성적을 낼 수도 있다.
그래서 투자자는 경로의존성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집중투자에서 분산투자로 넘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모든 시기에 똑 같은 투자법을 고수한다면 리스크에 스스로를 노출하게 된다.
금리 인하시기에 맞는 투자법이 있고, 금리 인상시기에 맞는 투자법이 있다. 주식시장에 과열된 상태에 맞는 투자법과 공포에 질린 시장에 맞는 투자법이 있다. 이를 잘 구분하고 각각에 맞는 투자법을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오랜 시간 살아남는 투자자로 남는 비결이다.
경제학이 풀지 못한 시장의 비밀
-마이클 셔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