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여기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 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의 몰락 개념을 자신의 저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처음 언급했다. 이를 두고 예술이 몰락하고 대중문화가 시작됐다고 평하기도 한다.
한때 예술은 그들만의 문화였다. 글을 아는 사람들만의 문화였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의 문화였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전은 문화에도 혁명을 가져왔다. 문화는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대중에게 퍼져 나갔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로뎅의 조각과 같은 예술 작품에는 고유한 독특성이나 유일성이 존재한다. 이는 초월적 존재로써 단순히 물리적 형태나 외관을 뛰어넘는 권위를 가진다. 발터 벤야민을 이를 “아우라” 라고 불렀다. 이 아우라는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보다 쉽게 예술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예술작품을 보고 쉽게 비판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영화나 다른 대중문화를 두고 쉽게 비판할 수 있게 됐다. 예술작품도 점점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복제의 기술이 발달함과 궤를 같이한다.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 책은 귀하게 여겨졌다. 함부로 읽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책을 접하기 쉬워졌고 기존 책에 있었던 아우라도 사라졌다. 미술, 영화와 같은 문화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를 두고 아우라의 몰락이라고 말한다.
아우라의 몰락은 나쁜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예수의 대중화와 민주화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이 대중에게 열렸다는 의미다. 예술 작품이 가지는 권위나 매력은 떨어졌을 수 있지만 더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투자시장도 어쩌면 예술작품이 겪은 아우라의 몰락과 유사한 변화를 겪었다. 투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반 투자자가 직접 시장에 참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보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브로커를 통해서만 거래했다. 이때 브로커가 가진 정보는 대단히 귀한 것이었다.
브로커가 가진 정보의 정확도를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가지는 권위는 상당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과 돈을 쥐는 구조였다.
하지만 현대 투자시장에서 정보는 거의 대부분이 공개되어 있다. 내부자 정보나 극소수의 정보를 제외하고는 원한다면 누구나 정보열람이 가능하며, 정보는 빠르고 멀리 퍼져나가는 속성을 가진다. 이제 더 이상 정보는 소수의 계층이 소유하는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정보의 열람이 쉬워졌고 정보의 양마저 많아지자 정보가 가진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정보가 넘쳐나자 소음과 정보를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정보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개인투자자는 HTS와 MTS를 이용해서 손쉽게 주식을 사고팔 수 있다. 더 이상 브로커를 통해서 사지 않아도 된다.
정보가 공개되자 매수매도시에 전문가의 영향력 역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판단하는 개인투자자가 많아진 것이다.
다만 아직도 전문가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인간은 불확실성에 약하기 때문에 확신에 찬 말을 따르고 싶은 경향을 보인다. 절대, 무조건, 반드시, 확실히와 같은 확신에 찬 어조는 과학적 사고와 어긋난다. 하지만 투자시장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전문가는 늘 인기가 좋다.
많은 투자자들이 투자전문가에 선망을 느낀다. 그들의 행동에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전문가의 투자 성적은 개인투자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높은 수익률이 조명받는 이유는 높은 수익률을 거둔 전문가가 노출되기 때문이다.
투자 기관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깊다. 그러나 기관 투자와 개인 투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개인 투자자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걸음이다. 기관 투자는 정교한 시스템 안에서 철저히 계획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들 역시 고유한 어려움을 겪는다. 남의 자금을 운용해야 하는 기관은 눈에 보이는 단기 성과를 요구받는다. 성과가 없다면 투자금이 빠져나가게 마련이다.
피터 린치의 마젤란 펀드는 13년간 연평균 29%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객의 절반은 손실을 봤다. 하락장에서 펀드를 환매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가치 투자자 장마리 에베야르도 비슷한 사례를 겪었다. 그는 IT 버블 당시 시장의 비이성을 간파하고 기술주를 외면했다. 고객의 돈을 절반 잃는 것보다는 고객을 절반 잃는 것이 낫다는 그의 철학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객들이 펀드를 떠나자, 결국 그의 펀드는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이처럼 기관 투자자는 짧은 시간 지평 안에서 성과를 보여줘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단기적 목표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개인 투자자는 이러한 제약에서 자유롭다. 정보 격차가 사라지고(기관이 도덕적 해이를 범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상사나 고객의 눈치를 보며 단기 성과를 내야 할 필요도 없다. 대신 개인 투자자는 자신의 시간 지평에 맞춰 투자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개인 투자자들은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개인 투자자의 시간 지평도 기관 투자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짧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인 투자자는 기관의 단점을 답습하고, 기관의 장점을 취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개인 투자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중문화와 시장 정보를 올바르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대중문화는 소비를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 소비는 이데올로기가 조작한 이미지와 선동에 의해 형성될 수도 있다. 루이 알튀세르는 대중문화가 대중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경제 권력의 의도적 설계에 따라 소비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투자 시장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정보의 접근성이 향상된 만큼, 이제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소음을 걸러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언론은 소비를 창출하고, 소비되는 것은 주로 자극적인 뉴스다. 인간의 본성상 이런 뉴스는 더 많이 소비되고, 이는 개인 투자자의 대표성 편향과 기저율 오류를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경제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개인 투자자의 두려움과 욕망을 자극한다. 개인 투자자가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 할 두 가지는 바로 이 두려움과 욕망이다.
개인 투자자는 정보를 능동적이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만의 투자 원칙을 확립한다면, 이는 기관 투자자가 가진 시스템을 개인의 방식으로 구현한 셈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기관의 단점인 짧은 시간 지평을 개인 투자자의 장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다음은 개인 투자자의 시간 지평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