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능 -케네스 밀러-
만약 뇌가 '정신'과 동일한 것이라면 현대 신경과학에 의해 우리는 뇌가, 그리고 따라서 우리의 정신적 자아가 우리 신경계의 생물학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물론 이 신경계 자체도 자연선택의 힘에 의해 빚 어진 진화의 산물이다.신경과학자이자 저술가인 샘 해리스에게 이것은 자유의지(freewill)가 환상이라는 의미다. 우리의 결정은 의식적 선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일련의 배후의 힘과 정신적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행동의 자유를 믿는 것 조차도 그저 진화가 우리 뇌 속에 프로그래밍 해놓은 계략에 불과하다.
해리스의 설명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궁극에 가서는 우리가 당연히 조종 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서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다.우리의 몸이 그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유전자를 보존하고 전파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면 뇌 자체도 당연히 그런 프로그램의 일부일 것이다.
만약 뇌가 그저 그 기계의 한 부품에 불과하다면 뇌는 진리나 아름다움에 복무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의 성공을 저울질하는 계산기에 불과하다.
-케네스 밀러-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세포의 집합 덩어리다. 그리고 세포는 DNA에 저장된 기록을 기반으로 기능하고 살아간다. 이 부분은 생물학적으로 명확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포의 집합 덩어리인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는가? 만약 인간의 모든 행동과 판단이 세포의 활동과 신경계의 반응으로만 이루어진다면, 자유의지는 그저 생물학적 프로그램의 결과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세포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DNA에 새겨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과 판단 역시 세포적 활동의 결과이고, 자유의지는 생물학적 착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조차도 진화 과정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다. 신경과학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인간의 의식적 선택이 무의식적 결정 이후에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뇌는 먼저 행동을 결정하고, 나중에 그 결정을 ‘내가 선택했다’고 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기계가 미리 작동한 뒤 사용자가 그 기계를 조작했다고 착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행동이 결국 무의식적 과정의 결과라면, 자유의지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결국 세포가 모여 이루어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철학과 과학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자유의지가 정말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저 뇌의 복잡한 계산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지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믿는 자유의지가 생물학적, 신경학적 과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뇌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착각하도록 진화했을 뿐, 그 모든 판단과 선택은 이미 정교하게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르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다른 실체로 보는 이원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이고, 물질은 연장된 실체로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즉, 데카르트의 이론에 따르면 물질이 생각할 수 있다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정신과 물질은 그 본질에서부터 다르기 때문에, 생각은 정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는 데카르트와는 다른 접근을 했다. 그는 물질 자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버클리의 주장은 모든 존재는 정신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곧 지각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어떤 물질을 지각하지 못한다면 그 물질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이론에서는 물질이 스스로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사유하는 물질의 개념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로 존 로크가 있다. 그는 『인간 오성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제 마음이 가령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고 아무 개념도 담겨 있지 않은 흰 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어떻게 채워지는가? 그 종이는 어떻게 인간의 분주하고 무한한 공상에 의해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게 그려지는 광대한 내용을 획득하게 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를 갖게 되는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한마디로, “경험으로부터” 라는 것이다.”
로크는 인간의 정신이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고 사고하게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유 또한 물질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 역시 경험이라는 물질적 세계를 통해 형성되며, 이는 곧 사유하는 물질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로크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학적 존재지만, 그 생물학적 구조와 경험이 결합되어 정신적 활동, 즉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결국 로크는 물질과 정신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고, 경험을 통해 사유하는 능력이 물질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럼 인간은 행동을 할 때 자유가 있는가? 로크가 말하는 자유는 외부의 개입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하나 하겠다. 여러분은 과연 사람이 하루 동안 내리는 결정과 판단이 몇 번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하루 동안 내리는 판단은 평균적으로 35,000번이다. 이 숫자에는 무의식에 의한 자동적 판단, 사고를 거친 뒤 내리는 의식적 판단, 숨쉬기나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미세한 판단, 그리고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중요한 판단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무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에 자유가 있는가? 무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의식은 유전과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세포의 활동이다. 결국 무의식은 생물학적, 물리적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셈이니, 로크가 말한 외부 개입이 없는 자유는 무의식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 일부 사람들은 이를 유사과학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현대 신경과학과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다.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영혼이나 비물질적 정신이라는 개념에 물리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며 유물론적 일원론을 내세웠다. 홉스는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 즉 사유는 뇌와 신경계라는 물질적 구조의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현대 신경과학은 이 주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사실들을 밝혀냈다. 뇌 영상 기술을 통해 인간이 특정한 생각을 할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사유는 뇌의 물리적 활동에 기반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칼 포퍼를 떠올려보자. 과학적 사고는 반증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지금까지의 발견은 단지 반증되지 않은 사실일 뿐이다. 과연 사유를 단순히 전기 신호와 뉴런의 움직임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신경과학은 여전히 이 부분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칼 포퍼는 일원론과 이원론의 한계를 뛰어넘어 제3세계를 주장했다. 그의 삼원론에 따르면 세상은 세 가지 세계로 나뉜다. 제1세계는 물질 세계다. 책이나 도구처럼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존재가 여기에 속한다. 제2세계는 개인의 정신 세계다. 우리의 감정, 생각, 의식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제3세계는 인간이 창조한 세계다. 책을 읽고 사유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글로 남긴다면 그것은 제3세계에 속한다. 흥미로운 점은 제3세계가 다시 제1세계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사유가 글로 남겨져 책이라는 물질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칼 포퍼의 삼원론은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적 논쟁을 넘어 인간의 사유와 창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조명한다. 결국 인간의 행동과 자유의지는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활동, 그리고 인간이 창조한 세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존 로크와 홉스는 일원론을 주장했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라는 의미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을 주장했다. 물질은 사유할 수 없기에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칼 포퍼는 삼원론을 주장했다. 사유는 단순한 뇌의 활동이 아니라 각 세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현대 신경과학은 사유할 때 뇌에서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사유가 뇌의 물리적 움직임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뇌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여러분에게 자유의지란 있는가?
나는 투자자로 살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투자자로서 내리는 수많은 판단들이 정말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되는가 하는 점을 수없이 고민했다.
내가 어떤 종목을 매수하기로 했다면 그것이 과연 어떤 사고의 과정에서 결정된 것일까? 이 부분에 항상 의문이 들었다. 로크가 말한 자유가 외부의 개입이 없는 판단과 행동이라고 했을 때, 투자자의 판단이 정말 외부의 개입이 없을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시장이 좋아 보여 매수에 나선다고 한다면, ‘시장이 좋다’는 판단 자체가 외부의 매수세를 본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나의 판단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 무엇에 영향을 받았는지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나아가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그 생각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적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적어보니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정말 너무나도 사소한 이유도 나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시 느꼈던 기분 또한 판단에 큰 영향을 준다. 기분은 수많은 요소에 의해 만들어진다. 전날 잠을 잘 잤는가, 날씨는 어떠한가, 시장 분위기나 주변 사람들의 말은 어떤가 등등. 그렇게 만들어진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성향의 투자가 나올 수도 있다.
우리에게 정말 자유의지가 있는가? 과거의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가? 1년 전 내가 매수했던 종목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있는가? 만약 수익이 났다면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손실 중이라면 "이걸 내가 왜 샀지?"라며 과거의 나를 원망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는 어떤 영향을 받아서 그런 판단을 내렸던 것일까? 지금의 나는 당시의 내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주가가 오를 것 같아서", "호재가 있어서" 같은 단순한 이유는 소용이 없다. 진짜로 그 결정을 내리게 만든 원인, 즉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당시의 영향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나 역시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반복적인 흐름 속에서 자유의지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피드백 이론이 자유의지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생각은 물질이 하는가? 정신이 하는가? 그럼 그 생각을 만드는 것은 나인가, 아니면 외부인가? 외부의 개입이 없는 생각이란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생각에 자유가 없다면, 내가 내리는 투자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자유의지에 대한 논란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논쟁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투자자로서 중요한 것은 당신의 생각과 판단에 자유가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다. 만약 자유가 없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가?
궁금하다면 지금부터라도 기분이 변하거나 생각에 변화가 생길 때 세세하게 기록해보라. 그 작은 기록이 당신의 판단과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인간의 본능
-케네스 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