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무한성

by 폴리래티스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에서 올까?


우리가 겪는 불안, 두려움, 스트레스, 망상과 같은 대부분의 부정적인 기운은 과거 혹은 미래에서 온다. 지나간 일에 대한 자책과 후회,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과 상상이 마음을 잠식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우리는 과거를 살지도, 미래를 살지도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을 산다. 시간은 강처럼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점으로만 경험된다. 이 점이 바로 현재이고,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실재다.


우리는 영원과 무한성에 대해 오해해왔다. 영원은 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영원은 시간이 없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영원과 무한성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가 영원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를 실재하는 것처럼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고통을 만든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영원을 시간의 지속이 아니라 시간 없는 점으로 본다면 영원한 삶은 현재를 사는 사람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영원을 설명하는 철학적 문장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고통 구조를 정확히 짚어낸다.


진시황은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불로초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영원 속에 살고 있었다. 실재하는 현재를 살면서, 실재하지 않는 영원을 찾다가 오히려 진짜 영원을 잃어버린 셈이다.


앨런 왓츠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우리는 분명 시간의 흐름 속에 사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 모든 순간 속에는 언제나 영원한 지금이 존재하며, 이 영원한 지금은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지금을 알아차리는 것이 영원을 발견하는 것이고, 영원을 발견하는 것이 깨어남이라면, 그 깨어남 역시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이 관점을 투자에 대입해보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진다. 투자에서 실패하는 대다수의 이유는 현재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가격에 집착하고, 미래의 하락을 두려워한다. 그 마음이 판단을 흐리고 행동을 왜곡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인간이 과거로부터 배우고 미래를 상상하며 예측하고 가설을 세우는 능력은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핵심 기능이다. 우리는 먹히지 않기 위해 상상했고, 불안했으며, 그 불안이 한 발 앞서 대비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불안 자체가 아니라, 불안을 실재로 착각하는 데 있다.


영원과 무한성은 우리에게 과거나 미래로부터 도피해 현재에 안주하라고 말하지 않고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는 현재에 있고, 과거와 미래는 도구다. 이 구분이 무너지면 투자는 흔들린다. 만약 내가 어떤 종목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이유로 보유했든, 현재의 가치와 구조가 그 이유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매도할 이유는 없다.


주식을 매도하는 합당한 이유는 더 나은 대안을 발견했을 때이거나, 자금이 필요할 때다. 반대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이 종목이 언젠가 떨어질 것 같다는 상상만으로 매도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세계에 현재의 자산을 넘기는 행위다.


예측은 해야 한다. 가설도 세워야 한다. 그러나 그 예측과 가설이 실적, 구조, 데이터, 가격이라는 형태로 현재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행동해야 한다. 그 순간 매도는 공포가 아니라 대응이 된다.


영원한 현재에 발을 두고, 미래를 도구로 사용하는 투자자만이 불안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영원과 무한성은 투자에서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철학은 더 이상 도피처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



image.png 켄 윌버 (지은이),추미란 (옮긴이)판미동2025-08-21원제 : Finding Radical Who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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