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너는 자유다.

-나에게 밤이란?

by 은효

[스페인, 너는 자유다]라는 전 KBS 아나운서 손미나의 여행서가 있다. 아나운서 손미나에서 여행작가 손미나로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책이다. 10년도 훨씬 전 어느 날인가 서점 구경을 하다가 책 제목이 눈에 딱 띄어서 집어 들었고, 서서 읽다가 스페인과 손미나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결국 책을 사고야 말았던 기억이 있다.


“밤, 너는 자유다.”


이 순간 밤을 떠올리니까 나는 왜 대뜸 이 말이 떠오를까.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하루 중 내가 좋아하는 세 가지 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점심시간, 퇴근시간, 취침시간이라고.


이 셋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단연코 취침시간이라 할 수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씻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두 다리 쭉 뻗고 누웠을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푹 잠만 자면 되는 것이다. 이 심리적 안정감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나는 잠을 자면서 하루 동안의 긴장과 피로를 다 풀어낸다. 이렇게 밤잠은 나를 무장해제 시켜준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시간은 퇴근시간. 나는 법원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법원에 기분 좋은 일로 오는 사람은 딱 한 종류, 집을 사서 소유권이전등기를 하러 오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 또한 등기소가 대부분 법원 본원에서 분리되어 외부로 나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법원에서 근무를 하다 보면 방문하는 민원인들 모두가 하나같이 화가 나있거나 불안해 보이거나 긴장되어 있다. 그들이 낸 소장이나 신청서를 읽다 보면, 정말로 드라마나 영화보다 현실 속에서 더 비현실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남을 실감하게 된다. 하루 종일 이런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나 또한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점심시간은 일과 분리되어 잠깐 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고, 퇴근시간은 일에서 벗어나 나의 시간, 나와 가족의 시간, 나와 친구들의 시간이 되는 출발점이 된다. 다행히 법원의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어느새 퇴근시간인 경우가 많으니까.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장에서의 퇴근이 집으로의 출근 같은 생활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저녁준비를 해서 먹고, 아이의 하루를 점검하고, 숙제를 봐주든 뭘 하던 아이가 잠들 때까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돌아보니 잠시 잠깐이 아니었나 싶다. 학년이 올라 갈수록 아이를 돌보는 시간은 점점 줄더니, 올해 중학생이 된 딸아이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는 무관심한 척해주는 것이 더 좋은 배려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오늘 저녁엔 무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레어온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8시 30분 정도가 된다. 나는 1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다음 날이 원활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 된다. 보고 싶었던 넷플릭스 드라마도 있고, 영어회화를 공부하려고 설치한 휴대폰의 유료앱도 있고, 또 읽으려고 가지런히 꽂아둔 책장의 책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얼른 내 작은 서재로 가서 노트북을 켠다. 요즘 가장 마음이 끌리는 것은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시작한 글쓰기 모임에 내기 위한 글을 한편씩 써 내려가는 것이 재미있다. 오늘은 무엇을 소재로 써 볼까?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할까? 그 다음은 무슨 내용을 쓰지? 어제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며 비문과 어색한 표현을 고치고, 내가 써놓고도 정확한 의미가 헷갈리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보기도 한다. 비록 에세이 형식의 생활글이지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지만, 나는 글쓰기 초보자이므로 조심조심 한줄한줄 써 내려간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한 편의 글을 단톡방에 올리고 나면 그 뿌듯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리고 문우들이 달아주는 칭찬의 댓글과 공감의 표시들은 부끄럽지만 나를 더 춤추게 한다.


손미나가 안정적인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뒤로하고 스페인이라는 이국에서 생활하며 느꼈을 자유로움을 나는 요즘 직장에서 퇴근하고 내게 주어지는 ‘밤’, 나의 작은 서재에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밤, 너는 자유다.”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 이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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