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녁

어디에 사나요?

by 온점


너는 들녁살아. 은영은 마지막 퇴근을 앞두고 카톡으로 내게 말했다. 빈티지 옷 가게 아르바이트에서 어디 사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나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들녘이 바른말이지만 은영은 그렇게 말했다. 내 고향이다. 들녘. 조금만 눈을 돌리면 들판을 볼 수 있는 장소. 전라북도의 김제.



은영은 그녀의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데리고 그 들녁으로 귀농을 했다. 소를 키우는 남편을 돕고, 옥수수와 고구마 농사를 하며 지냈다. 그녀는 외로웠을 것이다. 도시에 살던 그녀는, 친구 한 명 없는 외딴 시골에 떨어진 그녀는, 시내로 나가려면 버스를 한 시간 기다려야 하지만 운전을 할 줄 모르는 그녀는 말이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의식주 중 가장 이루기 어려운 것이 주인 것 같다. 먹는 것은 언제든 배달을 시킬 수 있고 입는 것도 내일이면 바로 도착할 인터넷 쇼핑으로 해결이 가능한데 주거지는 그렇지 못하다. 싸구려 방에서 자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채광이 좋지 않아서 대낮에도 항상 어둑어둑한 그런 방에서 낭만 있게 살려고 몸부림친다. 그래도 처음 왔을 때는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나 싶었는데 사람냄새가 좀 나는 것 같다.



한국말로 ‘산다’는 말은 거주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생존의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어디에 사는가? 단순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서 살아가는가 나는.



그 싸구려 방의 앞 집에서는 고양이를 키운다. 먼지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회색 고양이다. 그래도 나는 먼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무 흔한 이름이니까. 바닥이라고 부른다. 땅바닥, 길바닥. 처음 봤을 때도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있었다. 앞집은 고양이를 내놓고 키우는지 자주 밖을 돌아다닌다. 그래서 처음에는 길고양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보이지 않더니 깁스를 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제야 돌봐 주는 사람이 있는 고양이인 것을 알았다. 바닥이도 집이 있는 셈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양이로 사는 일은 힘든 일임이 분명하니까.



나는 바닥이와 친하다. 주먹 쥔 손을 코 앞으로 가져다 대 냄새를 맡게 하는 일명 ‘고양이 인사’를 몇 번 하고 나선 어느 순간 만지는 것을 허락하더니 이젠 나를 보면 드러눕는다. 어쩔 때는 핥아도 준다. 고양이의 거친 혀로 핥아주는 느낌은 왠지 기분이 묘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먹이를 주고 그러지는 않는다. 고양이를 책임질 수 없으면서 귀엽고 불쌍하다는 이유로 먹이를 주는 것은 오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의 삶을 대신 살아줄 용기가 없다면 알량한 동정보다는 무관심이 낫다는 글을 어디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친구가 되는 것을 택했다. 동정이 아니라 애정은 줄 수 있으니까. 그런 바닥이는 신촌에 산다.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 집이라는 흔한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랑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는 사람은 홈리스인 것일까?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거주지가 집이 될 수는 없는 것일 것? 아무튼 저 문장이 진실이라면 나는 들녘에 사는 것이 맞다. 가족이 거기에 있으니까. 지금은 집을 떠나 있을 뿐이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게 된다면 거기가 다시 내 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서 나는 여기가 집이 아니다.



바닥이는 자기가 사는 곳이 어딘지 알지 궁금해진다. 바닥이는 신촌에 산다. 내가 들녘에 사는 것처럼.


202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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