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쯤 출근을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카카오맵에서 '1분 35초 뒤 도착예정'이던 버스는 10분이 다 되어가도록 오지 않았다. 앱에 다시 들어가 보아도 도착예정까지 남은 시간이 1분 35초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됨을 깨달은 나는 급하게 다른 버스를 찾았다. 평소보다 10분이나 늦게 출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터라 걱정이 앞섰다. 나는 반드시 정시에 자리에 앉아야 하는 일을 한다. 나는 초등학생들에게 화상 수업을 한다. 11살부터 13살까지의 아이들에게 역사와 토론, 글쓰기 등을 수업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수업시간에는 카메라 앞에 앉아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어찌어찌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겁먹어야 했는지 우습기까지 했다.
아이들도 여전했다. 그들에게 작은 태블릿 속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선생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그들이 내가 지각할 뻔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자명했다. 그들의 작은 세상은 나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묘한 일이다. 씁쓸함을 동반하는 안도감이다. 불안뿐 아니라 내가 우울할 때도, 기쁠 때도 아이들은 여전할 것이다. 일에서 만나는 이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특히 그들이 하루에 20명 가까이 만나는 서로 다른 초등학생이라면 특히 그 거리감은 중요할지도 모른다.
세상과, 사람들과 거리감을 가지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좋은 방법이다. 직장에서 내가 맡은 일을 하고, 인간관계에서 내가 해야 할 일과 약속한 일을 하는 것. 당연한 일만을 하는 것. 에너지 소모, 감정 소모를 최소한으로 하는 것. 아끼고 아끼고 필요한 일, 꼭 해야만 일을 하는 것. 그 거리감이 필요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거리감이 무섭다. 아이들을 한 명의 사람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무섭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종종 아이들이 나를 '수업하는 기계'처럼 볼까 무섭다. 편한 일이다. 안전한 일이다. 그러나 씁쓸함은 피할 수 없다.
수업 커리큘럼 중 수업 내용에 관한 질문을 만들어 나누는 시간이 있다. 한 아이는 그 자리에서 다른 아이에게 '어디에 사냐'는 장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 행동은 제지하라고 교육받았기에 급하게 그의 마이크를 껐다. 아이들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생이 마이크를 켜지 못하면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조차 힘들고, 서로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은 가질 수 없는 관계. 나는 그들에게 웃고, 밝은 말투로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사이는 한겨울 쇠막대기처럼 차갑다.
거듭 반복하지만 편한 일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생기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퇴근 후 달갑게 통화할 누군가가 있기에, 출근하기 싫다고 투정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똑같은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도 개인적인 의견을 나의 말투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었다면 내가 마주쳐야 하는 따뜻한 체하는 차가운 관계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고정으로 들어가는 수업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려 애쓴다. 또 그들의 행동을, 성격을, 의견을 보려고 애쓴다. 그들에 대한 나 혼자만의 미안함으로 택한 방법이다. 한겨울 쇠막대기를 끌어안아 체온으로 데우려 시도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차가울 때가 많다. 내 요령이 부족한 탓일지 모르겠지만 씁쓸함 가득한 일이다. 종종 내가 가르쳤던 학생을 길에서 마주치는 상상을 한다. 서로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억되고 싶기에 기억한다. 내가 접하는 이들과 내 사이가 차갑지 않기를 바라 끌어안고 한기를 버틴다. 이것은 사랑받고 싶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