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다리가 너무 많거나, 아예 없거나, 눈코입의 모양이 사람과 다르거나, 피부의 감촉이, 색이 징그럽다는 까닭도 있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이 많은 까닭도 있을 것이다. 벌레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원생생물들도 이름에 '충'자를 붙이곤 하며 다리 여섯에 머리 가슴 배로 몸을 나누는 곤충, 거미류나 지네 같은 다지류도 벌레다. 반대로 다리가 없는 지렁이도 벌레다. 무엇이 그들을 벌레로 불리게 하는가.
벌레의 이미지는 명확하다. 징그럽고, 하찮으며, 귀찮은 존재. 제법 시간이 지난 유행이지만 사람도 유형에 따라 끝에 '충'을 붙여서 벌레로 부르기도 한다. 물어보지도 않는 것들을 지긋지긋하게 설명하는 이들을 '설명 중'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은 앞서 말한 지네나 곤충 등과는 생김새나 생물학적인 유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이 그들을 벌레라 불리게 하는가.
벌레라 불리는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물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타자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혐오하는 사람들을 벌레라 부르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시킨다. 상대방이 인간이 아니니 존중할 필요도,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다. 거리낌이 없다. 마치 거슬리는 초파리를 손바닥을 부딪혀 잡는 것처럼 상대방을 벌레로 부른다.
징그러운 외모를 가진 것이 아님에도 그 사람들은 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벌레라고 불리는가? 애초에 '징그럽다'는 생각은 무엇일까. 상대적인 기준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것들'을 징그럽게 여긴다. 서두에서 설명한 벌레의 외형적 특징이 그 예시일 것이다. 그러나 벌레가 아닌 생물, 예를 들어 강아지나 고양이도 우리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종이 다를 뿐인 가족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그 차이를 '이해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강아지나 고양이의 생각은 조금 노력하면 이해할 수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벌레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벌레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인가. 벌레는 벌레의 삶을 살고 나름의 생을 처절하게 살아갈 텐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함부로 여겨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나 또한 벌레가 집 안에 들어오면 살충제부터 찾는다. 결국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나의 작은 불편함, 찝찝함이 더 중요한 것이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나 또한 누군가에게 벌레일 것이다. 이해받지 못할 사람일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으니. 슬픈 일이다.
애벌레는 벌레보다는 귀여운 단어다. 세상 모든 생물은 어릴 때는 전부 귀엽기 때문일까. 애벌레는 알다시피 벌레가 되기 전의, 벌레가 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애벌레다. 지금은 벌레의 대우를 온전히 받지 않아도 언제든지 벌레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애벌레다. 모두가 몰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애벌레가 벌레를 혐오하는 세상이다. 당신은 애벌레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모든 것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시대다. 사람들은 나와 너를 나누며 너를 벌레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라는 큰 개념을 알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더라도, 그것이 징그럽고 짜증 나게 보일지라도, 벌레를 미워하지 말자. 우리는 모두 애벌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