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교차

by 이야기여행자

“우리는 반역자가 아니야. 단지 진짜 세상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이야.”
은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겁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Director는 우리에게 세 가지 명제를 강요했지. 첫째, 질서만이 완벽함을 만든다. 둘째, 통제로서만 질서를 지킬 수 있다. 셋째, 우리는 완벽한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 이 명제에 따라 라이선스 제도가 생겨났고,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자리를 빼앗았으며, AI 감시망은 인간을 철저히 구속했어. 그 끝에는 뭐가 남을까? 인간성을 잃어버린, 껍데기뿐인 인간들… 결국은 휴머노이드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이 될 거야.


코다의 구성원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헬멧을 벗은 얼굴들은 모두 다르게 생겼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확고했다. 공포와 희망이 뒤섞이고, 빼앗긴 희망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섞인 확고한 눈빛! KS3019는 그들의 눈빛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Director와 경찰국은 그들을 ‘무질서한 폭도’라고 규정했지만, 그의 눈앞에 있는 그들은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은주는 KS3019에게 한 장의 기록지를 꺼내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DRX-00, 휴머노이드형 중앙 AI, 위치좌표 39.0.90.78’


“Director의 본체가 있는 곳이야. 아까 요하탄이 말하려 했던… 이번에 입수한 정보지. 물론 실체가 아닌 관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를 파괴한다 해도 Director가 소멸할지는 장담할 수 없어.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또 다른 진실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찾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건 틀림없어. 나와… 아니 우리 모두와 함께 해 줄 수 있겠어?”


KS3019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전에… 왜 내가 당신들과 함께 해야 하지? 설마 처음부터 당신은 그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했던 건가?”

은주에게 종이를 받으며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3년 전, 휴가를 내고 찾은 센트럴타운 마지스타디움. 눈부신 불빛 아래 클래식 밴드 Ah-Ha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그는 흥분된 마음으로 몸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그의 품에 안기듯 쓰러졌다.


“어머! 미안해요. 발을 헛디뎌서…”


헬멧 너머 전해진 단아한 목소리, 중간키에 날씬한 실루엣. KS3019는 그녀가 대단한 미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헬멧 안 그는 미소를 지었으나 다행히도 그녀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기에 안심했다. 헬멧이란 참 편리한 것이었다. 나의 감정을 숨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의 감정을 알 수 없기에 답답하기는 해도... 헬멧 HUD로 그녀의 정보가 확인되었다.


‘EJ3242, 여성, 28세, 공연관람 라이선스 보유’


그렇게 시작되었던 인연은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해 갔다. 둘 다 연애 라이선스 보유자이기도 했지만, 같은 라이선스를 여러 개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제약 없이 만나서 같은 관심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가 작곡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KS3019는 굉장히 흥분했다. 그녀에게 작곡을 하면 어떻겠느니, 이것을 보며 어떤 악상이 떠오르냐는 등 본인이 하지 못하는 것을 그녀가 해주길 무던히도 바랬다. 하지만 그녀는 작곡 라이선스는 물론이고, 요리 라이선스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바빴고, 무언가를 직접 하는 일에 있어 난색을 표했다. 결국 그의 기대는 늘 허공에 머물렀다.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녀는 비밀리에 코다 활동을 해야 하므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당신에게 목적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 이후로는 정말 좋아하게 됐어. 이건 진심이야… 당신이 결혼 라이선스 발급을 거부당했을 때는 찢어지듯 가슴이 아팠어. 정말로 결혼하고 싶었거든.”

은주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봤어. 당신은 결혼 라이선스 없이도… 아니, 오히려 그 덕분에 더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은… 나도 목적을 잊을 만큼 행복했어. 하지만 어찌 되었던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 운명은 아니었던 것은 맞는 것 같아…”


“… 왜지? 왜 하필 나였던 거지?”

은주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도 기억할 거야. 6년 전에도 AI네트워크 해킹 사건이 한번 더 있었어. 그때도 마찬가지로 경찰국에서는 즉시 차단되었다고 발표되었지만 사실은 달라. 우리는 그때 Director가 관리하는 중요 인물들의 리스트를 입수했어. 그 명단에는 여기 있는 나, 요하탄, 세이렌, 그리고 두란도, 그는 지난번에 죽은 그 남자야. 그리고 당신의 이름도 있었어.”

“내 이름…?”

“그래. 당신의 진짜 이름이야. KS3019가 아닌 ‘엘리온’. 우리는 그 이름을 ‘위대하고 숭고한 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KS3019, 아니 엘리온이라 불리운 남자는 아득해지는 느낌으로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버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 거지?”

“나? 나는 지도자가 꿈이야. 물론 라이선스는 없지만.”

그녀는 박수를 치며 큰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이들의 이야기 대로라면 은주는 리더십 라이선스 발급불가, 두란도는 악기연주 라이선스 발급 불가, 세이렌은 가창 라이선스 발급 불가, 요하탄은 프로그래밍 라이선스 발급 불가였던 것이다.


‘그럴 리가…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어!’

그의 운명, 그의 과거, 그의 사랑.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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