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벙커는 희미한 조명 아래 먼지가 낮게 깔려 있었다. 전선이 천장과 바닥을 뱀처럼 기어 다녔고, 벽마다 낡은 모니터들이 파르르 떨리는 빛을 흘렸다. 폐기된 콘크리트 파편 위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천천히 몸을 돌려, 굳어 선 KS3019를 바라봤다.
“… 어떻게 된 거지?”
KS3019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눈앞의 그녀가 믿기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그 표정은 완전히 낯설었다.
“모든 것을 설명해 줄게. 좀 긴 이야기가 될 거야. 그리고 내 소개를 다시 해야겠네. 나는 EJ3242가 아니야. 내 진짜 이름은 은주야.”
“은주…”
그 이름은 낯설었지만 묘하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KS3019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맞아. 우리 부모님이 지어준 진짜 내 이름.”
“진짜 이름이라…”
KS3019는 세이렌도 그리고 죽은 그 남자도 ‘진짜 이름’이 있었던 건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고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Director는 라이선스라는 제도를 통해 인간의 모든 욕구와 재능을 억압하고 있어. 당신의 꿈인 작곡과 연주. 그 부분에서 당신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하지만 너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간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Director는 오히려 능력이 없거나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거짓판단으로 발급을 거부하고 있는 거야.”
“그걸… 어떻게 알지?”
KS3019의 목소리가 떨렸다.
은주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얼마 전 일어났던 AI센터 해킹 사건 기억하지?
“…어. 3초 만에 끝나버린.”
그녀는 잠시 웃다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건 미끼였어. 사실은 Director의 본체가 있는 메인 AI센터를 해킹하기 위해 주위를 분산시키기 위한 작전이었고, 결국 우린 성공했어. Director는 진실을 외면하고 3초 만에 해결했다고만 발표했지만.”
그때, 어둠 속에서 낯선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실루엣은 푸른 모니터 불빛에 잠시 윤곽을 드러냈다가 금세 그림자 속에 섞였다.
“그래. 멋지게 성공했지. 대단한 작전이었어.”
“인사해. 요하탄이야. 이 사람은 천재 해커야. 하지만 Director에게 프로그래밍 라이선스조차 발급거부 당했어. 당신과 똑같은 경우지.”
요하탄은 어깨를 으쓱하면 말했다.
“거기서 어떤 것을 발견했는지 알아? 바로 천재적인 능력에 따른 발급거부 알고리즘 코드야. 그리고 Director의 본….”
“요하탄! 잠깐만.” 은주가 그를 가로막았다. “이건 내가 직접 말하고 싶어. 미안.”
“아… 아니야. 알았어.”
요하탄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그녀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세계에는 수많은 휴머노이드들이 인간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것을 알지? 이젠 누가 인간이고 휴머노이드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인간 틈에 섞여 체제의 완벽함을 찬양하고, 인간들을 세뇌시키는 거야. 자발적으로 이 체제 안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 그게 실패하면… 제거하지.”
그녀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여러 종이 중 한 장을 뽑아서 흔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했다.
“당신의 파트너…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도 휴머노이드일 거야…”
“… 그럴 리가…”
KS3019의 손끝이 굳고, 온몸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그간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단 몇 분 만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또 있어. 이것을 봐줄래? 이게 당신의 발급 평가 기록이야.”
‘작곡 능력 초고도. 위험지수 100%, 관련 라이선스 접근거부, 경찰관 라이선스 발급 요망’
KS3019는 숨이 막혔다.
“그렇다면 긴 방황이라는 저 곡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당신이 작곡 라이선스 발급을 신청했을 때, 뇌파검사에서 추출된 데이터였어. 아마 라이선스를 발급받았다면 언젠가 직접 노트 위에 써내려 갔겠지만… 당시엔 당신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던 곡인 거지. 그리고 Director는 이런 곡을 작곡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당신을 위험요소로 분류한 거야. 그런데 우리가 해킹하면서 Director의 서버 안에 당신이 그때 남겨놨던 곡을 빼왔고, 그것으로 우리들이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불렀던 거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세이렌이 그러더라. 그 곡을 부르면… 본인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고… 사실 나도 그 노래 정말 좋아해. 우리는 곡에 ‘긴 방황’이라는 제목을 붙였어. 원작자 허락 없이 미안하지만… 마치 노래 제목처럼 당신과 우리들 모두 긴 방황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