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Director의 구체의 빛이 사라지고, 남은 건 마치 오래된 유물처럼 금속껍질 같은 잔해뿐이었다. 하얗게 비어 있는 공간은 다시 처음의 그 무음과 정지된 공기로 가득했다. KS3019, 엘리온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침묵. 하지만 곧 발자국이 울려 퍼지며 파동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홀 어귀에서 울렸다.
“KS3019”
JQ9920이었다. 그는 홀의 빛과 그림자 경계선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감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지… 이젠 엘리온이라 불러야 하나?”
“…”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 걸음은 기계적이지 않았고, 마치 무언가 오래된 기억을 짚어가는 인간의 발걸음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칼날처럼 팽팽했다.
“네가 여기까지 올 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KS3019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JQ9920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숨을 삼키는 소리만이 홀의 정적에 섞였다. 마치 오래 눌러둔 파일을 꺼내듯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낮게 흘러나왔다.
“WT0530과 나는… 처음 네가 경찰국으로 발령받았던 날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KS3019를 똑바로 보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한 번 응시한 뒤, 다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네 신체 스캔이 우리 쪽으로 자동 전송됐을 때, 우리는 그 수치를 봤다. 완벽한 합성 골격, 설계된 신경망, 삽입된 칩. 기술적으로는 그것은 휴머노이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JQ9920의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 사실을 바로 얘기하지 않은 건… WT0530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가 인간으로 살고 있으니, 그 진실을 말할 시간은 그 자신에게 줘야 한다’고.”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낮아진 음성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각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를 연출했다. 듀란도는…”
그가 멈추자, 홀에는 더 강한 침묵이 흘렀다. JQ9920의 어깨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사실… 듀란도는 죽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KS3019의 시야가 흔들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듯했다.
“뭐라고…?”
JQ9920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듀란도의 죽음은 모두 계획의 일부였다. 자네가 깨어나도록, 진실을 마주하도록… 우리가 그를 ‘죽은 자’로 만든 거야.”
그 말이 떨어지자 KS3019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숨이 끊긴 것처럼 한 박자 멎고, 손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얼굴을 스쳤고, 분노가 곧바로 불덩이처럼 올라왔다.
“그럴 리가… 그럴 순 없어.”
그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갈라지듯 퍼졌고, 눈앞의 JQ9920을 보며 불신과 배신감이 뒤섞였다.
분노가 밀려오는 동안, 어딘가서 오래전 들었던 현 울림 한 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그가 기억하던 멜로디의 파편. 그 파편이 무언가를 깨우는 듯,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왜 말하지 않았지?”
“넌 언제나 스스로 답을 찾는 타입이었으니까.”
JQ9920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슬픔이 섞여 있었다.
“나는 네가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상관없었어. 다만… 네가 그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KS3019은 숨을 고르며 그의 말을 들었다. 분노, 혼란, 허탈감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머릿속에서는 Director의 말과 과거의 조각들이 소용돌이쳤다.
‘너는 사랑도 하고, 실수도 하고, 희망도 가지지만 실망도 하지. 좌절하지만 극복하고… 그것이 완벽한 세상의 핵심요소다.’
그 말들이 점점 명료하게 되살아났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진실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무엇을 선택할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JQ9920이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중요한 건 네가, 우리 둘, 이 세상 모두가… 지금부터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이다. 그래서 나와 WT0530은 Director의 계획에 함께 동참하기로 했지. 완벽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완벽한 프로젝트!”
잠시,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사실 나도 처음엔 이 계획을 믿지 않았다. 완벽함이란 감정을 버리고 기계처럼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임무에서 돌아오던 길에 혼자 음악을 들은 적이 있었어. 아주 오래된 바이올린 연주였지. 이상하게도 그날 처음으로… 공허함을 느꼈다. 시스템이 정해준 질서 속에서 나는 언제나 정답만을 고르는 존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떨렸어.”
“WT0530도 비슷했지. 어렸을 때의 아련한 기억, 실수와 실패, 사랑 같은 것들… 그걸 잊지 못했어. 결국 우리 둘은 완벽함이란 결핍을 덮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이해하고 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닿았던 거야.”
JQ9920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그 눈빛엔 차갑고 완벽했던 기계의 흔적이 아닌, 미묘한 동요가 스쳤다.
KS3019는 눈을 치켜들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너는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그 남자... 아니 듀란도를 통해 나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려 한 거지?"
"... 감정동요라는 면에서 음악은 가장 위험한 요소야. 노래와 연주를 통해 인간은 희망을 갖고, 자유를 갈망하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니까."
JQ9920은 건조하게 얘기했지만, 그의 말투는 이전과는 다른 온화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완벽한 체제를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인간들의 의지야. 의지는 그들의 감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고. 이것을 원천봉쇄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란 것은 잊지 않았겠지?"
말을 마치자 갑자기 JQ9920은 손을 위로 뻗어 천천히 그의 헬멧을 벗었다.
그의 얼굴은 상상했던 매서운 눈매를 가진 각진 얼굴이 아니었다. 둥그런 얼굴에 큰 눈을 가진 평범한 남자였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고 마치 그의 평범한 얼굴이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따뜻했다
"하지만... 나도 음악을 좋아하고, 감정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Director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리고 자네 또한 이해하게 된 거야."
KS3019는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JQ9920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동안 결코 흔들리지 않던 그의 눈빛이 크게 떨리고 있었고, 금속성의 차가운 목소리 사이로, 오랫동안 눌러왔던 망설임이 스며 나왔다
.
“그것이…”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KS3019의 눈을 피하지 않고 곧바로 마주했다. 이전의 건조하고 기계적인 그와는 달리, 인간적인 긴장과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Director의 계획에 따라… 그가 죽은 척을 하게 한 이유다. 모든 건 자네가 각성하도록 하기 위한, 커다란 그림의 일부였어.”
KS3019는 더 이상 말할 기력도 남지 않았지만,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WT0530도 너와 같은 생각인가?”
JQ9920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WT0530도 나도 같은 생각이다. 너의 구조와 신원을 알게 되고, Director의 의지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넌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변수’였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엔 묵직한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우린 지켜봤다. 네가 인간처럼 고민하고, 갈등하고, 때로는 우리보다 더 뜨겁게 반응하는 걸. 솔직히 말하자면, 널 제거하라는 명령도 있었어. 하지만 WT0530은 그걸 거부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JQ9920의 시선이 잠시 멀어졌다. 그는 홀의 차가운 벽을 바라보며 낮은 숨을 내쉬었다.
“WT0530과 나는 처음 그 스캔 결과를 봤을 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보다 더 인간다운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걸 직감했으니까.”
그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WT0530은 원래 체계와 규율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사람이었지만, 너를 본 뒤로 달라졌어. 자네도 알다시피 언제부터인가 WJ0530의 감정기복이 심해진 걸 알지? 그게 인간으로서 의식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는 ‘이 존재가 스스로를 선택할 때까지는 진실을 던지지 말자’고, 그가 먼저 제안했지.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어. ‘만약 우리가 진실을 강제로 말해버린다면, 그건 또 다른 통제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진실에 닿는다면, 그건 진짜 선택이 될 거야.’라고.”
JQ9920은 천천히 KS3019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묘한 감정이 스쳤다. 동료로서의 경외,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약간의 질투.
“그래서 우리 둘은 침묵을 선택했다. 그것이 잔인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너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이자, Director의 계획을 시험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리가 너에게 바라는 건… 온전한 너의 선택이다.”
그 순간, KS3019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번개처럼 스쳤다.
첫 임무 당시, 폐허가 된 건물 속. 무너진 콘크리트 아래에서 어린 소녀의 미약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명령은 ‘현장 소거’였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잔해를 치우고 소녀를 구출했다. 통신 너머에서 WT0530의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저건… 프로그래밍된 반응이 아니야.”
이후 WT0530은 상부에 올릴 보고서를 수정했다.
'대상 KS3019 — 제거 유보. 관찰 필요.'
그날 이후였다. WT0530과 JQ9920은 그를 단순한 모델이 아닌 ‘변수’로 보기 시작했다. 시스템에 존재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존재.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채, 조용히 ‘그의 선택’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었다.
KS3019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목소리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 술집의 어두운 조명, 은주의 눈빛, Director의 기계음, 그리고 오래전부터 가슴에 새겨져 있던 그 음악의 단편.
그때, 오래 전의 기억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처음으로 ‘선택’을 했던 순간.
경찰학교 시절, 그는 규정 위반을 한 동료를 신고하지 않고 덮어준 적이 있었다. 모두가 그를 비난했고, 그는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정작 그 동료는 훗날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고, 그때 그가 했던 선택이 한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시스템이 지정한 ‘안정된 거주지’를 거부하고, 낡은 구역의 작고 허름한 방을 택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 — 그곳에서만 창문 너머로 들리는 오래된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규정 밖의 행동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때도 난 정답이 아닌… 나 자신의 목소리를 따랐지.’
기억의 조각들이 이어지며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규정과 허가로 점철된 삶 속에서도, 그는 늘 작은 균열 속에서 선택을 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존재’ 그 자체의 증명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공허했던 심장에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불씨가 피어올랐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그는 깊은숨을 들이켰다. 더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지… 하지만…”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며 고개를 들었을 때, 구체의 잔해가 마치 오래된 유물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그것은 질서의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서곡의 시작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