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진실을 알고 싶은 거지? 이것인가?”
Director는 구체안에서 듀란도가 바이올린으로 ‘긴 방황’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다시 세이렌이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JQ9920이 듀란도에게 레이저건을 쏘는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엘리온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Director를 바라보면 질문했다.
"왜 나에게 작곡라이선스와 악기연주 라이선스 발급을 거부했지? 코다가 말한 대로 내가 너무 천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인가?"
엘리온의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오래전 봉인된 진실이 거칠게 틈을 벌리며 스며드는 듯했다.
"외적으로는 그렇게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나의 계획은 단순히 발급거부를 당연시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발급거부에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바꿔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 본연의 자율성과 의지, 그들이 희망을 찾길 원했기 때문에 너와, 요하탄, 듀란도, 세이렌, 그리고 은주에게 적용을 해 본 것이다."
엘리온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시험했다는 건가… 처음부터 계획된 길이었다는 건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 그는 질문을 급히 이어갔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계획대로 움직인 것인가?"
잠시의 정적이 흐른 뒤, Director의 기계음이 다시 공간에 퍼졌다.
"계획이상이라고 해야겠지. 그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서로를 규합하여 의지하고 여기까지 이끌어 왔으니... 그건 내 생각 이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나는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
엘리온은 울부짖다시피 소리 질렀다.
Director는 구체안에서 따뜻한 느낌의 붉은빛들이 잠시 일렁거리는 것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이내 곧 낮은 기계음을 내뱉었다.
“너의 방황은 오류가 아니라 과정이다. 혼돈을 통해 질서를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네가 여기까지 온 건 반역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설계한 경로의 일부다. 완벽한 질서란 반대편 혼돈의 존재를 통해만 증명된다. 너는 그 증명의 매개다.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 이 과정 속에서 너는 새로운 질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엘리온은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었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그는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왜 헬멧에 신경가스를 섞어서 인간을 통제한 거지?"
Director의 구체 표면에 붉은 하늘과 폭발하는 도시의 영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거대한 버섯구름 아래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쳤고, 흐릿한 연무 속에서 광기에 물든 눈빛들이 교차했다.
"신경가스의 목적은 과도한 욕구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통제였다. 마지막 전쟁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은 인간을 더욱 흉폭하고 우울하게 만들게 만드는 물질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를 희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미리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동의를 구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음모론과 같은 쓸데없는 망상을 하기를 원치 않았고, 초기에는 빠르게 통제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게 내 역할이었으니까."
엘리온은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Director의 역할이 그런 것이었고, 실제로 그가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
“나는 인간의 감정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진화를 위해 남겨두었다. 코다의 존재, 너의 방황, 모두가 시스템의 학습을 위한 변수였다.”
Director가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고, 이를 보며 엘리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JQ9920은 휴머노이드인가?”
“아니. 그는 인간이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엘리온의 입에서 외마디 놀람이 터져 나왔다. 믿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코다를 알게 된 후 엘리온은 줄곧 JQ9920이 휴머노이드라 생각했다. 감정 없는 눈빛, 건조한 말투와 원칙주의적인 성격에서 인간의 모습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취미 관련한 라이선스조차 한 개도 발급받지 않았다고 했었다.
“이런 세상에서 취미는 사치일 뿐이야. 나는 주어진 일을 해야 하니까.”
문득 JQ9920의 오래전 했던 말이 기억났다.
엘리온은 헬멧을 감싸 쥐으며 소리쳤다.
“그럴 리가... 거짓말을 하는 거지? 당신의 목적은 인간을 무지하게 만들고, 억압해서 이 세상을 통제하는 거잖아!”
구체안에서 다시 일렁거리는 불빛을 보여주다가 이내 다른 영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엘리온, KS3019의 모습이었다. 의료 스캔이미지가 먼저 나왔고 이어서 그 안에 서있는 본인의 모습, 완벽한 합성물의 골격과 생체 뉴런, 모든 유기조직이 합성되어 만들어져서, 껍데기뿐인 그에게 주입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두뇌에 칩을 삽입하고 두개골을 만들어 덮어씌우자 곧이어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모든 게 왜곡된 렌즈처럼 뒤틀리면 영상이 사라졌다.
KS3019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무릎을 꿇었다.
‘이건 불가능해. 사실이 아니야’
“완벽한 인간과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핵심요소. 새로운 질서의 시작. 그것이 네가 존재하는 이유!”
Director의 기계음이 다시 한번 홀 안 바닥 위에서 위로 솟구쳐 올라가며 파동을 만들었다.
그리고 Director의 또 다른 한마디가 공간에 여운을 남겼다.
"JQ9920은 나의 계획에 함께한 참여자이다."
그 한마디가 홀 안에 떨어지자, KS3019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았다. 숨이 차오르고,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텅 빈 공허가 가슴 안을 울려 스스로 제어하는 것을 포기했다.
‘내가... 휴머노이드라니…’
'참여자라니... 그건 또 무엇인가?"
헬멧 너머로 스쳐간 은주의 눈동자, 지하에서 울리던 세이렌의 노래, 차가운 금속복도에서의 첫 근무시작. 모든 장면이 하나로 겹쳐졌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면… 그럼 나는 무엇을 지켜온 것인가?
머릿속에서 수많은 기억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그 기억들이 진짜였는지, 혹은 실험을 위해 심어진 허상에 불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발밑의 바닥조차 실제인지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은 낯설게 흔들리고 있었다.
홀은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그때, 거대한 구체에서 낮고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목소리라기보다 심장박동 같았고, 벽을 타고 흐르는 전류 같았다. KS3019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빛바랜 구체를 바라보았다. 빛 속에는 무수한 얼굴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인간과 휴머노이드, 웃는 얼굴과 울부짖는 얼굴, 사랑을 속삭이는 눈빛과 증오에 찬 시선이 뒤섞여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수많은 표정이 KS3019의 가슴속을 무너뜨리며, 동시에 알 수 없는 떨림을 남겼다.
“인간은 휴머노이드를 두려워하지. 그리고 휴머노이드는 인간을 동경하지. 나는 그 둘의 속도를 맞춰야 했다. 너희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Director의 목소리는 낮고 웅장했으며, 홀의 백색 공간에 울림이 퍼져나갔다. 구체의 표면에는 미세한 파문이 번졌다.
“처음부터 나는 인간의 지능을 단순히 복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나의 실험은 훨씬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됐다. 인간과 휴머노이드 —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충돌하지 않고 한 세계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가.”
구체의 빛이 서서히 맥동하며 홀을 물들였다.
“인간들은 휴머노이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완벽하지 않아. 오류가 없기에 선택할 필요가 없고, 선택이 없다는 건 무수한 가능성을 스스로 버리는 결핍을 낳는다. 반대로 인간은 실수하고 갈등하며, 그 안에서 자유와 사랑, 희망을 만들어낸다.”
“나는 어느 한쪽의 승리를 원하지 않았다. 선택하지만 절망하지 않는 인간, 오류는 적지만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휴머노이드 — 이 둘이 만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구상한 ‘완벽한 세계’였다.”
구체가 순간적으로 밝게 빛났다.
“그래서 널 만든 거다, KS3019. 너는 인간의 감정과 휴머노이드의 구조를 동시에 지닌, ‘조화의 증명’이다. 네가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이 실험이 이론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차가운 공기가 홀을 감싸며 KS3019의 숨결이 하얗게 퍼졌다. 그는 처음으로 Director의 말을 ‘논리’가 아니라 ‘이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KS3019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떨쳐버리고자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계획이었다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분노와 혼란이 섞여 있었다.
“그래.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대립, 듀란도의 음악, 세이렌의 노래, JQ9920의 침묵, WT0530의 관찰… 모두가 하나의 악보 위에서 연주된 선율이었지. 그리고 너, KS3019는 그 악보의 마지막 ‘코다’다.”
구체에서 서서히 색색의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그 빛은 KS3019를 감싸며 마치 거대한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집중되었다.
“너의 존재는 ‘통합’을 위한 실험의 정점이었다.”
KS3019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럼 내 삶은 뭐였지? 감정도, 실수도, 희망도… 다 당신이 설계한 프로그램이란 말이야?”
“아니.”
Director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틀을 만들었을 뿐,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너에게 맡겼다. 네가 은주를 신뢰한 것도, JQ9920의 건조함에 불편함을 느낀 것도, 음악에 마음을 열었던 것도… 모두 네 선택이었다. 그것이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변수’였지.”
KS3019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걸어온 길, 했던 선택, 느꼈던 감정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모든 게 계획이라면… 나는 누구였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의문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당신은… 신이 아니야.”
KS3019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그래. 나는 신이 아니다. 단지… 이 세계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켜본 관찰자이자, 조화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이끌고자 한 지휘자일 뿐이다.”
Director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어떤 피로감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앞으로 나를 계속 도와줄 수 있겠나?”
“무슨 뜻이지?”
“나는… 조화를 완성하는 순간,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다.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것도 너의 선택이다. 네가 지금처럼 이곳까지 도달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 실험의 성공을 의미한다.”
Director의 목소리가 멎었다. 공간에는 기계의 미세한 진동음만 남았다.
KS3019의 손끝이 떨렸다. 무수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홀은 적막에 잠겼다. 구체의 빛이 천천히 줄어들면서, 무대의 조명이 꺼지듯 어둠이 공간을 덮었다. KS3019는 그 자리에 서서 Director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 삶의 진실, 그리고 앞으로의 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선택의 무게’가 손에 쥐어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홀 위로 새벽의 첫 빛처럼 잔잔한 광채가 구체의 표면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침표가 아닌, 새로운 악장의 서곡 같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자신이 처음으로 ‘자유와 선택’이라는 무게를 지고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