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못이 아니야

by 이야기여행자

그 일이 있은 뒤로 나는 딸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보지 않았고, 딸은 내가 들어오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거실에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있었던 기억이 점점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그 불편한 공기가 시간이 지나며 익숙해졌다. 말이 없어진 대신 집은 조용해졌고, 나는 그 조용함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딸이 방에만 있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판단했다. 고3이었다. 지금은 감정 정리보다 집중이 우선일 시기였다. 말을 꺼내면 괜히 흐트러질 수 있었다. 해주고 싶은 말이 생기면 아내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식사는 거르지 않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하거나, 저녁상을 차리다 말고 “알겠어”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로서 할 일은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서는 여전히 불쾌함이 가시지 않았다. 딸이 내게 소리를 질렀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아빠라는 사람에게, 그것도 집 안에서, 그런 말투로 말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자기를 얼마나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아내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여보, 이제 그만해요. 그냥 이렇게 지내요. 얘도 예민한 시기잖아요.”
“그래서 가만있는 거야.”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나서면 더 커져. 대신 당신이 잘 봐줘. 내가 해야 할 때가 오면 그때 할 거야.”
아내는 대답하지 않고 고무장갑을 벗어 개수대 옆에 놓았다. 그날 이후로 그 장갑은 자주 젖은 채로 놓여 있었다.


아빠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나는 믿었다. 지금의 딸에게는 나의 개입이 필요할 거라고, 결국은 내가 기준이 되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사과는 상황이 정리된 뒤에 하는 것이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면 그날의 일이 모두 내 잘못이 되는 것 같았다.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끔은 딸이 먼저 한마디만 하면, 아니 문자로라도 “미안해요”라고 보내면, 나도 못 이긴 척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내가 밤마다 딸의 방문 앞에 멈춰 서 있는 걸 몇 번 보았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것도 보았다. 그 침묵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적어도 전부 내 잘못은 아니라고.

발치에서 코코가 하품을 하다 몸을 말고 돌아눕는 것을 보았다. 나는 괜히 그 머리 위로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다 너 때문이야.’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대화

아빠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된 뒤로, 나도 아빠를 피하게 되었다. 집에 있어도 방에만 있었고, 문을 닫아두면 그 안이 그나마 안전하다고 느껴졌다. 코코를 데리고 놀거나, 음악을 듣거나, 친구와 통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방문 앞에 놓인 접시가 어느새 비어 있었고, 다시 채워져 있었다. 엄마는 노크를 하지 않았다.

요즘 엄마는 자주 내 방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갔다. 아침에는 식탁 위에 비타민을 올려두었고, 저녁에는 내가 먹기 쉬운 반찬을 한쪽으로 몰아두었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내 책상 위에 새 노트를 올려두고 갔다. 나는 그 노트를 펴보지 않았다.


아빠와의 관계가 서먹해진 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풀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코코의 목덜미를 잡고 흔들던 아빠의 손, 그리고 나에게 다가오던 얼굴. 솔직히 무서웠다. 정말로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그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기억은 사과로 덮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내가 방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요즘은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런데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를 통해 아빠의 말이 전해졌다.


“아빠가 네 걱정 많이 하고 있어. 공부는 잘 되고 있니?”
“그냥 그래요. 신경 안 쓰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엄마는 잠시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문 손잡이를 한 번 더 잡았다가 놓았다.
“…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전에는 돈이 필요하거나 뭔가를 사고 싶을 때 아빠에게 말하면, 아빠는 엄마 몰래 도와주면서 늘 비밀이라고 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좋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비밀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쉽다. 가끔은 아빠의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다시 그 길고 단정한 설명과 설득을 떠올리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먼저 사과하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아빠는 지는 걸 싫어한다.
내가 먼저 사과하지 않는 이유도 분명하다. 그날의 공포를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내 잘못은 아니라고.


그 사이에서 엄마는 매일 같은 자리에 접시를 놓고, 같은 말을 전하고, 같은 문 앞에서 멈췄다가 돌아섰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질 것이고, 아빠는 내 방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나 또한 방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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