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상)

파국(破局)

by 이야기여행자

초가을이라지만 아침부터 날씨가 퍽이나 더웠다.
만덕은 앞마당을 쓸던 싸리비를 멈추고 휭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는 듯해 대청마루에 턱하고 걸터앉았다. 언년이가 지나가다 눈치를 주었다.

“그러다 대감마님 보시면 어찌하려고 그러시우?”
“지금 누가 있다고 그려.”

만덕은 낄낄 웃으며 마치 이 집주인이라도 된 듯 어깨를 폈다.
‘흥,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대감이고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머슴이더냐.’

시원한 바람이 저고리 속 땀을 식혀주니, 세상은 잠시 고요했고 이만한 호사도 없었다.

그의 이름 ‘만덕(萬德)’은 할아버지가 스님에게 받아 지은 이름이라 했다. 뜻이야 어떻든, 그의 인생은 여느 머슴과 같았다.


“네 이놈!”
“에구구, 마님.”
“하하하하.”

장쇠였다. 몸도 다부지고 말도 싹싹해, 대감어른도 마님도 아꼈다.
게다가 글까지 알아 잘난 척을 하니 만덕 눈에는 그저 얄미운 놈이었다.

“이놈아, 사람 놀래키지 말았어야지.”
“놀랄 짓을 했으니 놀란 거 아니우?”
“잠깐 쉬는 거여!”
“힘들면 뒤쪽에서 쉬던가.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순간 만덕의 기분이 싸악 식었다. 장쇠란 놈, 주는 것 없이 미운 놈이다.
얼마 전에도 앞집 최대감댁 여종과 농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장쇠란 놈이 끼어들어서는 한사코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이런 우라질…”

만덕은 싸리비를 장쇠 쪽으로 휘둘러 먼지를 일으켰다.
그때 행랑아범이 호통을 쳤다.

“이놈, 똑바로 안 하구 먼지만 일으키느냐!”
“아… 마당을 쓸고 있습죠…”
“곧 대감마님 오신다. 깨끗이 해놔라. 장쇠 반만 닮아라!”

행랑아범이 혀를 차며 사라지자 장쇠가 비죽 웃었다.

“만덕아, 내 반만 닮아라.”


만덕은 분해 죽을 지경이었다. 싸리비를 힘껏 꺾어버리려다 되려 튕겨 올라 턱을 맞았다.

“젠장할!”
“헉! 대감마님!”

만덕은 두 손 모아 허리를 굽혔다. 대감어른과 손님들이 멀뚱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싸리비는 멀찌감치 날아가 마당 위에 뒹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뒤, 대감은 혀를 끌끌 차더니 행랑아범에게 귓속말을 하고는 손님들은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그 뒤에 따르던 행랑아범은 그들이 다들 안채로 들어가자 얼른 되돌아와 만덕이의 귀를 붙잡고는 행랑채로 끌고 갔다.

“어쩌자고 그런 것이냐?”

“아무도 없는 줄 알고서... 죽을죄를 지었네요.”

“안 되겠다. 오늘 네놈 버릇을 고쳐놔야겠다.”

“제발...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몽둥이로 열대를 맞았다. 그날 밤, 엉덩이가 아파 누울 수조차 없었다.


‘머슴으로 사는 게 이렇게 서러울 일이더냐… 이참에 멀리 도망가 살자.’

눈물이 마른자리에 결심이 서자 옷부터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우선 부엌에 가서 남은 음식과 감자를 주워 보자기에 담았다. 하지만 수중에 돈푼이나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장쇠 놈은 지난번에 마님한테 닷냥 받았다고 자랑했겠다. 옳거니 그것이라도 가져가자.’

대화를 엿듣는 만덕

오늘은 9월 음력 첫째 날밤이라 달이 아직 차지 않아 으슥하니 그을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덕은 바깥채 장쇠 방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장쇠야, 그게 참말이더냐?”
“예, 어르신. 남도서 벌써 격문이 돌고 있다 합니다.”

“벌써 움직이는구먼.”

“예… 오늘은 참판댁하고 신윤무 대감 댁 갔다 왔습죠.”
“내일 밤이라지?”
“예…”
“이번 일만 잘되면 대감께서 널 양민으로 풀어주실 게다.”
“예… 그건 지도 참말로 바라고 있습죠.”

만덕의 심장이 철렁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다시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행랑아범은… 어찌하실 생각이시우?”

“나야 뭐 갈 데가 있냐?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란다.”

“그래도 땅도 좀 주신다는데...”

“너야 아직 젊으니까"

땅이라니! 만덕이는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을 떨어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방 안에서 잠시 기침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서신은 어쨌냐?”
“대감님 출타 중이시라… 일단 곳간 쌀가마 밑에 숨겨놨습니다.”
“동틀 전에 돌아오시면 얼른 드려야지.”
“예.”

이윽고 행랑아범이 문을 열고 나와 주위를 둘러보고 사라지자 만덕은 입술을 깨물었다.


‘쌀가마니…라고 했지…’

그는 곧장 곳간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개 짖는 소리와 새소리가 지척에서 들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뭔 땀이 이리도 난다냐..?”

만덕이는 흠뻑 젖은 채 곳간 문을 조심스레 열고는 쌀가마니를 뒤져 서신을 꺼냈다.

‘이게 뭐지? 당최 알 수가 없구만.”

펼쳐보니 무언가 휘갈겨 써져 있는데 글을 모르는 만덕이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저잣거리 이야기꾼이 글을 한다는 생각이 났다. 만덕이는 품에 서신을 넣고는 냅다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