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하)

적멸(寂滅)

by 이야기여행자

“아부지… 저도 관군을 해보면 어떻겠습네까?”

이제 막 수염이 보일 듯 말 듯 한 만덕의 말에 만덕의 아비는 숯검댕이라도 문댄 듯한 얼굴로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야아… 니는 노비라서 안 된다, 이놈아.”

만덕은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왜요? 나라 지키겠다는데, 노비면 어떻고 양반이면 어떻습네까! 왜 노비는 안 되는 겁네까!”


아비는 답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인도 관군이 되겠습네다!”

결국 만덕은 부아를 삭이지 못하고 관아로 쳐들어갔고, 강짜를 부리며 소리치다가 포졸 둘에게 마당 한가운데로 끌려 나와 사방에서 주먹이 휙휙 날아와 정강이가 터지고, 허리가 접히도록 얻어맞았다.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그날 만덕은 노비는 나라를 지킬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하지만 꺾이지 않았다. 허벅지는 시퍼렇게 멍들고 눈시울이 퉁퉁 부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오히려 더 뜨거운 게 피어올랐다.


옛 생각에 찔끔 눈물이 나던 만덕은 멀리 군영 앞에서 칼을 닦는 장정을 발견하자 달려가 말했다.

“사내분… 소인도 의병을 할 수 있습네까?”
칼을 닦던 장정이 만덕을 흘깃 보며 피식 웃는 듯싶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덕은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렀다. 관아에서 맞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겁이 저리 많아서야… 글쎄 말이다.”

그 말에 만덕은 어깨를 부풀렸다.
“겁…? 소인 겁 한나도 안 납네다!”

“의병은 누구나 될 수 있다네. 용기만 있다면 말일세.”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으며 허리를 제쳤다. 허리춤으로 칼집이 보였고, 알 수 없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만덕이는 나중에 그 칼집의 주인 이름이 ‘정문부’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문부는 말은 의연했고, 눈빛이 불꽃처럼 살아 있었다. 그 눈빛이 만덕을 단숨에 잡아끌었고, 그 말이 만덕의 몸에 불을 붙였다.

정문부와 만난 만덕

만덕은 그날부터 미친 듯이 훈련했다.
목검을 휘두르고,
창을 내질러 땅바닥이 패일만큼 찔러대고,
달리고 구르고,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다.

다만 말 타기는 배울 수 없었다.

“노비가 말은 무슨… 그냥 걸어라.”
훈련병 하나가 코웃음 치며 말했기 때문이다. 만덕은 말채찍 소리만 들어도 속이 쓰렸다.


한편 임금이 의주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이미 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점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것이었다.


“명나라가 임금님 입경을 막았다 카더라!”
“너무 빨리 도망 와서, 왜놈하고 짠 거 아니냐고 의심한다더라!”
“조정 대신들끼리 여기서 난리 쳤대. 술판 벌이고, 싸움질하고…”
“상놈들 먹을 것 입을 것 빼앗아서 연회 열었다 카더라!”

만덕은 혼자서 부르르 떨었다.

‘나는 상놈이지만 내 것 뺏기면 지킬라고 발버둥 치는데… 저 높은 것들은 왜 저러는 거냐?’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7월이 될 무렵의 일이었다.

정문부 장군이 임해군 처소로 불려 갔다. 만덕도 멀찍이 뒤를 따랐다.

“임해군 나으리. 신 정문부 인사드리옵니다.”

임해군은 요란한 비단옷을 입고 기름기 흐르는 얼굴로 정문부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직도 가등청정을 궤멸하지 못하다니… 혹시 역심이라도 품은 게 아니더냐?”

정문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만덕의 손아귀는 분노로 덜덜 떨렸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소인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사옵니다.”

임해군은 씨익 웃었다. 잔인한 아이가 개미를 눌러 죽이기 직전의 얼굴처럼.

“내 한 번 봐주겠다. 앞으로는 개처럼 나에게 충성하도록 하거라.”

만덕의 뇌리에 피가 확 올랐다.

‘저런 새우젓 같이 생긴 놈이 감히 우리 장군님께!’

하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는 걸 이미 몸으로 배운 뒤였다.


그 뒤 임해군의 패악질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저잣거리 아녀자들을 붙잡아 겁탈하고, 상인들의 돈자루를 걷어차 빼앗고, 술 취하면 아무 백성이나 세워놓고 볼기짝을 때리고, 지나가는 노인 혼을 빼놓도록 욕을 해댔다.

의병들은 밤마다 속삭였다.

“우리가 저런 놈을 지키려고 싸우는겨?”
“아이고, 나라가 망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우리 장군님만 아니었음, 벌써 칼 뽑았제.”

정문부는 단호했다.

“입 다물고, 우리는 백성의 목숨을 지킬 것이다. 쓸데없는 말 말고 제 할 일이나 하라.”

그 말에 의병들은 다시 침묵했지만, 입술은 피가 날 만큼 깨물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달이 유난히 밝아 그림자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드리워졌다.

만덕과 길상은 군영 주변 순찰을 돌고 있었다. 둘 다 노비 출신이라 서로의 처지가 몸으로 박혀 있었고, 마치 오래된 형제처럼 정이 들었다.

“길상아… 왜 우리가 이런 놈을 지켜야 한단 말이냐.”
“저놈은 인간도 아니지라. 썩은 내가 진동한당게…”


바로 그때였다.
멀리 임해군의 처소 담 너머로 서너 명의 사내들이 수상쩍은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 훌쩍 뛰어넘었다.

만덕과 길상은 동시에 눈이 커졌다.

‘저쪽… 임해군 처소 아녀?’

둘은 살금살금 다가갔다. 심장이 쿵쿵 울려서 발자국 소리가 다 들릴까 걱정될 정도였다.

처소 앞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그림자 셋이 처소 앞에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칼을 들었고, 둘은 몽둥이를 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앞에 술기운에 혀가 꼬인 임해군이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나으리, 여기 임해군입니다.”

그림자 중 하나가 낮게 말했다.
“잘 잡았다, 이놈. 왜놈보다 더한 적이니… 이제 니놈이 당해봐라.”

“자… 잠깐! 원하는 거… 다 들어주겠네… 돈도, 여자도… 말만 하게나!”

칼을 든 남자가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네 모가지여…”

그리고 칼날이 달빛에 번쩍였다. 하지만 이내 스릉 하는 소리를 내며 칼집에 넣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살려 데려오라고 하니... 대신 몽둥이찜질은 받아야 쓰겠다."

길상과 만덕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들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것이여.’
‘우린… 그냥 순찰만 돈 것이여.’


몽둥이를 든 남자 둘이 임해군을 돼지 잡듯 후려쳤다. 비명이 몇 번 났다가 그마저도 곧 끊겼다.

그리고 곤죽이 된 임해군을 거적에 돌돌 말아 어둠 속으로 질질 끌고 사라졌다

만덕과 길상은 움직이면 들킬까 싶어 담장 아래에 바짝 붙은 채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시장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회령 아전, 누구라 카더라. 아 국경인...맞아. 그이가 임해군을 잡아서 왜놈한테 넘겼다 카더라!”
"죽지는 않고 잡혀갔다던디? 죽어도 싼 놈인데 말여.”
“그놈 무슨 꼴 됐으려나? 꼴좋다!”

만덕은 귀를 한쪽으로만 열어두고 버드나무 아래에 누워 뜨겁게 달구어진 머리를 붙들고 자려고 했다.


어젯밤 일이니 뭐니… 그런 건 너무 복잡했다.
만덕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였다.

오늘 낮잠이… 참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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