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상)

몽진(蒙塵)

by 이야기여행자

초여름이라지만 햇발이 유난히 독했다.
의주 장터는 아침부터 술렁대며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장터 난전 위로는 파리 떼가 윙윙거리고, 뜨거운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더 진한 무언가가 공기 속을 떠다녔다. 불길한 예감처럼.

만덕은 머리에 얹은 짚모자를 번번이 고쳐 쓰며 장터를 기웃거렸다. 평소 같으면 건어물 냄새 맡다가 떡이며 엿이며 구경하며 빈둥거렸을 텐데, 오늘은 어딜 가도 사람들 입이 먹는 게 아니라 떠드는 데 바쁘게 쓰이고 있었다.


“와, 이거 무신 일이라요?”
만덕이 귀를 쫑긋 세우자, 옆에서 콩을 팔던 장사꾼이 손사래를 쳤다.

“니는 아직도 모르나? 신립 장군이 왜놈한테 져부렀다 카더라.”

“그 장군님이요? 여진족도 후려 패던 양반이요?”
만덕은 입을 딱 벌렸다.

“그라고 말이다. 요새 다 그 소리다. 나라가 큰일 났다 카더라.”

장터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죄다 재앙처럼 흘러 다녔고, 말끝마다 한숨이 줄줄 새어 나왔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어멈들은 부랴부랴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평소 사람들 틈에 끼어 농담 따먹기를 좋아하던 만덕도 오늘은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졌다.

만덕은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저 오늘 장터가 유난히 시끄럽고 앞으로는 더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뿐이었다.


그러다 박참봉이 곰방대를 쥔 손으로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바늘 끝처럼 가늘게 줄였다.

“야… 듣자 하니 임금님이 몽진을 하고 계신다 하네.”
“몽… 몽진이 뭐요?”
만덕이 어리둥절해 물었지만, 그런 만덕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대장장이 허 씨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이틀 전 평양을 떠났다고 하니… 내일이면 여기 오겠구려.”

‘임금님이 여기에 온다고?’

신립장군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무슨 난리가 나서 왜놈들이 북으로 몰려온다는 소리는 만덕이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임금님이 여기 오신다 하니 만덕이는 눈이 번쩍였다.

“그럼 여기서 잔치도 벌어지고, 할 일도 많아지겠습네다. 안그렀습네까?”

박참봉과 허 씨의 대화를 듣고 있는 만

동시에 박참봉과 허 씨가 만덕을 바라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는 박참봉이 곰방대로 만덕의 머리를 한대 내려치자, 이번에는 대장장이 허 씨가 뒤통수를 탁 쳤다.

“에이그, 이것이! 몽진이 도망가는 게 몽진이다, 인자 알긋나!”

“에? 임금님이… 도망을… 칩네까?”

만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쉿! 입도 뻥긋하지 말어. 그 말 잘못하면 목 잘린다.”

만덕이는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두 사람을 멍청하게 번갈아 쳐다봤다.


장터 한가운데로 눈길을 돌리자, 사람들 틈에서는 더 큰 소문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평양이 함락됐다 카더라!”
“아이고, 세상이 다 뒤집히는갑네…”
“요즘은 말 하나 잘못하면 죽기 딱 좋을 때라오.”
“의주도 곧 난리 나는 거 아녀?”

말마다 불똥이 튀는 듯, 공기는 금세 살얼음판이 되었다.

만덕은 저잣거리 한쪽에서 북쪽에서 내려간 상인 서너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왜놈이, 왜놈이…' 하며 중얼거리는 걸 보았다. 그들의 짐마저 제대로 풀지 못한 채 길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섬뜩했다.

‘정말… 큰일 난 건가?’
만덕의 가슴이 왠지 모르게 쿵 내려앉았다.


그때, 말굽소리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사람들이 놀라 양옆으로 흩어졌고, 먼지가 폭발하듯 일어나며 사람들 얼굴 위로 날렸다. 그리고 갑옷을 두른 사내들이 장터 한가운데서 큰소리로 외쳤다.

“의병을 모은다! 나라가 풍전등화다! 함께 싸울 장정들은 이리 모여라!”

만덕은 침을 꿀렁 삼켰다.
‘와, 저 사람들 봐라… 칼 차고 말 타고… 저게 진짜 사나이 아녀?’

허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문부 장군이다. 함경도 출신이지.”


‘정문부… 장군님…?’ 만덕의 눈이 빛났다.


그 순간, 만덕이는 상상했다.
자기가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타는 모습을.
칼집에 이름이 새겨진 장군이 되어
왜놈을 후려 패는 그 통쾌함을.

그 상상만으로도 만덕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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