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상)

성공(成功)

by 이야기여행자

그날은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쌓인 눈을 날려, 마치 하얀 먼지가 흩뿌려지는 듯한 날이었다.
만덕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팔기군 군영 뒤편 작은 언덕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정명수 역관이 전날 귀띔을 해준 덕에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내일은 귀한 구경을 할 터이니, 네놈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거라.”

정명수는 같은 천민 출신이지만 지금은 황제 귀에 속삭이는 사람이 되었다.
만덕은 그 말이 꼭 ‘재밌는 구경’ 같아 보였기에, 반쯤 호기심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언덕 아래, 청나라 군사들은 군더더기 한 점 없었다.
창끝이 일정한 각도로 반짝이고, 군사들은 얼어붙은 대지를 발로 누르며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정렬해 있었다. 말들은 코에서 흰 김을 뿜었고, 긴 북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 뒤로 검은 쇳덩이가 거대한 짐승처럼 서서 서늘한 공기 속에서 음산하게 빛났다.

‘저것이 홍이포라는 대포로구만…’
만덕은 목구멍을 꿀렁 삼켰다.

갑자기 얼어붙은 군영 전체가 흔들렸다. 어디선가 울리는 큰 북, 길게 끌리는 피리 소리가 설원을 가르며 퍼져갔다.


“황제가 납신다!”

동장군도 움찔할 소리였다.
순간, 군영의 공기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저 멀리 연기처럼 퍼지는 인파 속에서 금빛 장식의 가마와 호위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곧 용포를 두른 황제가 수항단 위에 마련된 용상에 올라앉았다.

만덕은 그 순간, 숨조차 쉬지 못했다.

‘와… 이게 황제라는 자의 위엄인가…’

황제 양 옆에는 용골대 장군과 무서운 눈매의 장수들이 도열해 있었고, 수많은 병사들이 검은 파도처럼 양옆을 메웠다. 그런데 그 절묘한 한복판, 황제의 바로 옆에 정명수가 서 있었다. 바람 속에서도 그의 콧수염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만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 참말로 대단한 양반이네. 나도 저 정도만 됐으면…’


그때였다.
눈발 사이로 하얀 옷을 입은 사내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는 흑건을 둘렀으나, 옷은 누더기처럼 얇았다.
한겨울인데도 덜덜 떨며 걷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저게 누군인교? 죄인 끌려오는 것도 아닌디…’

만덕이 눈을 비비며 자세히 보려 했으나, 세찬 바람 때문에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았다.

조금 뒤, 사내는 황제 아래에 당도하자 곧장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낮고 엄중한 목소리로 뭐라 말하자
용골대 장군이 통역처럼 이어 말하고,
그 옆에서 정명수가 다시 조선말로 옮겼다.

그러나 만덕의 귀에는 그 말이 하나도 닿지 않았다.

오직 이 말을 할 때는 정명수가 귀를 찢을 듯 크게 소리쳤다.


“군신의 예를 다해, 삼배구고두례 하라!!”


사방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만덕만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삼배… 구… 뭐시라꼬?”

설명을 들을 새도 없이, 하얀 옷의 사내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어깨를 크게 떨더니, 마치 땅에 몸을 바치는 것처럼 전신을 굽혀 한 번, 다시 두 번, 마지막으로 세 번 절을 했다.

그러고는 양 무릎을 꿇고 하얀 이마를 돌처럼 단단한 땅에 쿵! 또 쿵!, 또 쿵!
총 아홉 번.


만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사람이 하는 짓이가? 머리에 피가 터지고 혹이 돋겠구먼…’

아니나 다를까 눈발 사이로 보니, 사내의 이마에 벌써 피가 번지고 있었다.

의식은 한참을 더 이어졌고, 황제는 미동도 없이 하늘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명수는 그 곁에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누구길래 저렇게 망신을 주는 것인지… 쯧쯧’

의식이 끝난 후, 만덕은 얼어붙은 발끝을 비벼가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뭐가 재밌다는 거지. 저 양반한테 물어봐야겠다.’

정명수에게 술상을 차려주는 만덕

그날 저녁

정명수는 술상을 가져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만덕은 낮에 얼음을 깨고 잡아온 붕어로 찜을 만들어 술과 함께 내어갔다.

정명수는 잔을 들며 콧수염을 비벼댔다.

“내 심양으로 돌아가거든, 계집 여럿 들여놓고 잔치를 벌일 것이다!”

만덕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이고 나으리… 오늘 뭔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교?”

정명수는 잔을 ‘턱’ 하고 내려놓았다.

“좋은 일? 오늘이 그 조선의 임금 놈이 내 발아래에서 머리에 피가 나도록 절을 한 날이 아니더냐! 하하하하!”


만덕은 그제야 아침의 하얀 옷 사내가 ‘왕’이었다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했다.

‘그게… 임금이었단 말이가?’

정명수는 씩 웃었다. 그리고는 한숨에 술을 모두 들이켰다.

“임금도 별 것 없더라. 이제 내가 조선을 휘어잡아야겠다.”

정명수는 붕어찜을 손으로 집어 뜯어먹고는 기분 좋게 드러누웠다.

만덕은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가마 밖으로 흘러나오는 황제의 북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저 양반… 너무 설친다. 너무…’

바람이 문을 흔들며 울부짖었고 기고만장한 정명수의 모습에 만덕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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