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沒落)
심양의 겨울은 뼈를 씹는 듯했다.
만덕은 강가에서 얼음을 깨 붕어를 잡던 삼전도 시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삼전도 보단 따뜻하네. 먹을 것도 많고…’
정명수 역관을 따라 심양까지 굴러온 것은 어디까지나 살기 위해서였다. 전쟁 통에 고향은 잿더미가 됐고, 부모는 들짐승에게나 먹혔을 것이며, 자신을 기억해줄 사람도 없었다. 만덕에게 조선이니 애국이니 하는 건 사치였다.
정명수는 만덕을 하대하면서도 곁에 두었다.
궂은 일은 알아서 척척 하고, 말귀도 잘 알아듣고, 무엇보다 충성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덕이! 어제 가져온 공물 목록 정리해 놨을 터인데, 그거 어디 놔뒀더냐?”
“저… 그 장부 말씀이십니까? 방 안 상 위에 잘 모셔놨습죠.”
정명수는 흐뭇하게 웃으며 콧수염을 비비적댔다.
“잘했다, 잘했어. 저게 내 목숨줄이야. 조선 사절단 놈들이 저 장부 하나 믿고 와서 굽신대는 거 아니겠느냐?”
그 말처럼, 정명수의 집은 늘 술냄새와 기생들의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조선에서 올라온 사절단은 추운 대문 밖에서 두 시간씩 떨다가, 은 몇 냥을 바치고서야 정명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봉림대군조차도 빈손으로 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고, 신하 정뇌경이 붉게 언 손을 부들거리며 항의했다.
“네 이놈 정명수! 지금 내가 누구를 모시고 왔는지 알기나 하나?”
하지만 정명수는 술기운을 빌려 코웃음을 쳤다.
“봉림대군이면 뭐가 다른가? 빈손이면 내 앞에 서지도 못한다. 돌아가라.”
만덕은 문 뒤에서 그 꼴을 보며 생각했다.
‘정명수… 이 양반은 오래 못 버티겠는데…’
그러나 만덕은 아쉬울 것도 없었다. 정명수가 망하면 다른 주인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됐다.
초가을의 달빛이 유난히 밝던 밤,
대문을 가만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만덕이 조선말로 묻자 문 밖에서 역시 조선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정… 뇌경이네.”
봉림대군과 함께 왔던 그 신하였다. 이번엔 혼자였고, 눈빛은 더 매서웠다.
“자네가 만덕이지?”
“예에… 그런데 무슨 일로—”
정뇌경이 조용히 만덕의 손을 잡았다. 만덕의 손을 양반이 붙잡는 건 처음이었다. 단정한 말투였지만, 눈빛만큼은 얼음 같았다.
“자네, 살고 싶지 않은가?”
만덕의 심장이 움찔거렸다.
“…예? 그건 또 무슨—”
정뇌경은 낮게 속삭였다.
“정명수가… 조선에서 황제께 드리는 공물을 빼돌리고 있다. 그 증거가 될 장부가 그의 방에 있을 것이다.”
“아… 아닐 겁니다. 나으리. 그 장부는…”
“확인하면 알 일이네. 자네 같은 자에게 위험한 부탁인 줄 안다. 하지만 이건… 봉림대군께서 간곡히 청하는 일이네.”
만덕은 속이 울렁거렸고,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아오씨… 왜 나를 끌어들이는겨. 난 그냥 밥 먹고 자고 싶을 뿐인데…’
그러나 거부하기엔 그 눈빛이 너무 간절했고, 동시에 위협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정명수가 무너지면 자신도 얽혀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오히려 균형을 맞춰놓는 것이 살 길이었다.
결국 만덕은 살기 위한 냄새를 맡은 짐승처럼 말했다.
“…장부를 가져오면… 정말… 저를 지켜주십니까?”
“약속하네.”
그날 밤 정명수는 술과 여인에게 취해 누각에서 잠들었다.
만덕은 땀에 젖은 손으로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캄캄했다. 상 위에 놓인 장부가 달빛에 걸려 은은히 빛났다. 겉장에는 기름때가 스며 있고, 붓자국이 뒤엉켜 있었다. 만덕은 글을 모르는 눈으로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걸 가져가면… 난 배신자인가? 아니지 살아남는거지. 그렇고 말고!’
만덕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장부를 품고 밖으로 기어나오자 정뇌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뇌경은 마치 굶주린 매처럼 장부를 낚아채 훑어보았다.
그리고 붓으로 몇 줄을 급히 적더니 다시 만덕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고맙네. 자네 같은 사람이 나라를 살리는 것이네.”
‘나라? 나라가 나를 살린 적은 없는데…’
그러나 만덕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흘 뒤, 청나라 군졸이 들이닥쳤다. 포승줄에 묶인 정명수는 비명을 질렀다.
“이런! 무슨, 무슨 짓이냐! 나는 황제폐하의 총애를—!”
군졸은 쓴웃음을 지었다.
“총애? 네놈의 장부 다 들켰다. 공물 빼돌린 죄로 잡아간다!”
정명수의 얼굴이 백지로 변했다.
“만덕아! 만덕이 어딨느냐!! 이놈아!”
만덕은 마당 뒤 장작 더미 뒤에서 조용히 숨어 있었다. 숨도 쉬지 않았다.
‘미안헌디… 나도 살아야지.’
정명수는 거지가 되어 돌아왔고, 전 재산을 뇌물로 던져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심양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정뇌경은 처형당했다. 정명수를 모함했다는 죄명이었다.
봉림대군이 필사적으로 정뇌경의 무죄와 정명수의 죄를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정뇌경의 말 마지막 한 마디가 만덕의 귓가에 남았다.
“나는… 나라를 위해 했을 뿐이네…”
만덕은 그날 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선으로 쫓겨나는 날,
정명수는 넝마가 된 차림으로 만덕을 불렀다.
“만덕아…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일단 같이 가자.”
만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살짝 까닥였을 뿐이었다.
한참을 돌아가는 행렬에 섞여서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다.
뒤쪽 행렬에서 봉림대군이 만덕의 옆을 스쳐 앞으로 지나갔다. 그의 눈빛은 얼음 같았다.
“정명수… 내가 반드시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 눈빛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만덕은 몸서리를 쳤다.
‘저 양반 옆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 죽겠구먼…’
만덕은 그 길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다시 심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한테 조선이 뭔 의미라고… 어디든 먹고만 살면 됐지.’
눈보라가 휘몰아쳤지만 만덕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에휴… 살아남는 게 가장 큰일이지. 권력이고 나라고… 그게 밥이 되나.”
그리고 만덕은 다시 먹고 살 길을 찾아 눈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