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조(約條)
해가 뉘엿뉘엿 바다 밑으로 가라앉자,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바닷바람은 하루 전까지만 해도 살을 베던 칼바람이었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부드럽게 살결을 스쳤다.
만덕은 지게 끈을 매만지며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겨울이 넘어가니 땔감도 이젠 덜 쓰겠구먼.’
광 안에는 여전히 땔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저걸 채운 건 절반은 자기 힘, 절반은 여동생 양순의 부지런함 덕이었다.
양순은 얼굴 고운 만큼 손재주도 좋았다. 부모 잃고 둘이 의지하며 살던 지난 세월 동안,
양순은 살림을 맡고 만덕은 산 일·물 일·농사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버텨냈다.
“오라버니. 오늘은 기분이 많이 좋아 보오.”
양순이 웃으며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만덕은 숨길 것 없는 미소를 터뜨렸다.
“좋지. 좋다마다! 이만큼 모았으면 우리도 올해는 소 한 마리쯤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만덕의 얼굴은 살짝 굳었다. 요 며칠 계속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있었다.
양순 주변을 맴도는 사내.
원범.
기생오라비 같은 입매에 누더기와 손에 든 도끼를 들었어도 왠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기품이 묻어 있는 놈.
‘이 우짜다 이래 생겨먹었는지… 왜 이놈이 양순이에게 농을 치지?’
만덕은 괜히 목을 긁적이며 슬쩍 물었다.
“양순아, 요새… 별일 없지?”
“별일이라뇨?”
“누가… 희롱하거나, 수작 거는 놈 없다는 말이다.”
양순은 뭔가 순간 당황한 듯하다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뺨이 살짝 빨개져있었다.
“아녜요. 그런 사람 없어요. 걱정 마세요.”
만덕은 믿을 듯 말 듯한 양순의 얼굴을 바라봤다.
‘믿어야 하나… 근디 요새 그 원범 놈, 눈에 띄게 들락날락하던디…’
결국 그는 결심했다.
“내가 저 원범이란 놈을 한번 만나봐야겠구먼.”
다음 날, 해가 갓 떠오른 시각.
만덕은 지게를 메고 뒷산으로 나무를 주우러 갔다.
그런데 산자락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벌써 와 있는갑네…’
“어이! 거기 누구십니까요?”
두꺼운 옷을 입은 남자가 두리번거리다 손을 흔들었다.
“여— 만덕이 아닌가? 나 원범일세!”
꼭 찾아가려 했는데 먼저 걸려드니 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만덕은 슬며시 다가갔다.
“도련님, 아침부터 열심이시네요.”
원범은 웃었다. 그 웃음은 평민이 흉내내기 어려운, 이상하게 태가 있는 웃음이었다.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소? 이 몸이 왕이라도 되는 것도 아니니까.”
원범이 도끼를 잡은 손을 보자 붓보다는 도끼를 많이 쥔 손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무꾼 손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했다.
‘흠… 역시 뭔가 다르긴 다르구먼.’
만덕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원범이 난데없이 말했다.
“만덕이. 자네에게… 아주 긴이 할 이야기가 있네.”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만덕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입니까요?”
원범은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 나는 자네 동생 양순과 혼인하고 싶네.”
그 순간 만덕은 마치 뒤통수를 누가 망치로 내려친 듯 멍해졌다.
양순과… 혼인?
그저 나뭇가지만 주우러 왔을 뿐인데 산속에서 이런 일을 들을 재간이 있는가?
“예예?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혼인이라뇨?”
원범은 다급히 만덕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은 묘하게 따뜻했고, 잡는 힘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진심일세. 나는 양순이를 마음 깊이 좋아하고 있네.”
만덕은 원범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 조심스레 말했다.
“양순이도 좋다면… 저는 뭐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도련님이… 왕족이셨다 하지 않습니까. 저희 같은 상것 하고 혼인하셔도 되겠습니까?”
원범은 손을 놓으며 갑자기 크게 웃었다. 산골짜기 전체가 울릴 만큼 호탕하게.
“그런 걱정은 말게. 자네도 알지 않은가? 나는 그냥… 강화도의 나무꾼일 뿐일세.”
그 말은 시원했고, 담백했고, 왠지 쓸쓸하기까지 했다.
옳은 말이었다. 원범은 어릴 적부터 양민처럼 농사짓고 고기 잡고 나무했으니, 그의 왕족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만덕은 잠시 고민했다.
‘우리 양순이를 어디 듣보잡 무지렁이에게 줄 수는 없지… 그런 면에서라면 이 기생오래비가 백번은 낫지.’
결국 만덕은 경계심을 풀었다.
“그렇다면… 제가 양순이에게 말해보겠습니다. 허나, 양순이 눈에서 피눈물 나면… 저는 왕족이고 나발이고 모릅니다요.”
원범은 마치 사형선고가 뒤집힌 사람처럼 기뻐하며 연신 고맙다고 허리를 굽혔다.
그때였다.
멀리서 관아에서 뛰어나온 포졸들이 이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원범! 거기 있는 사람이 이원범이 맞소?!”
순간, 만덕의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 또 시작됐구먼.’
전에도 관원들이 장터에서 원범의 형을 끌고 가던 장면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이번엔 그 손길이 누굴 향할지는 명확했다.
만덕이 급히 물었다.
“도…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요?”
그러나 원범은 대답 대신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질리더니—
산 정상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고, 산새가 놀라 날아올랐다.
만덕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 이래서 왕족이랑 엮이면 안 되는 건데… 에휴…’
그리고, 바닷바람은 오래된 비극의 냄새를 실어와 강화도의 조용한 숲 속에 서늘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