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연말을 맞아 남편과 단둘이 제주도에 왔다. 한라산을 올라 새해 첫날을 맞겠다는, 결혼 전부터 늘 입에 달고 살던 내 버킷리스트를 드디어 실행하는 날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매년 12월이면 온 가족이 여행을 갔지만… 애들이 대학생이 된 이후부터는 나와 남편만 따로 다닌다.
이유? 단순하다. 그런데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지금도 눈썹 한쪽이 자동으로 틀어진다.
애들 때문에 피곤해서.
싸우고, 울고, 트러블 만들고, 고기 굽다가 서로 젓가락으로 때리고…
매번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까.
“얘네들하고 같이 다니면 너무 피곤해. 사건이 끊이질 않아.”
남편이 헉헉거리면서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답했다.
‘그건 애들 탓이 아니라, 당신 유전자 탓이야.’
하지만 겉으로는 다정한 척 웃었다.
“당신 하고 둘이 다니니까 나도 좋아~”
그리고는 쌩하고 고개를 돌렸다.
물론 내 진짜 속마음은, ‘나 혼자 오고 싶다’였다.
나는 대학시절 산악회를 했기 때문에 산을 좋아하고 체력도 좋다. 남편은…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굳이 올라가?” 주의다. 게다가 고소공포증도 있다.
문제는, 남편은 그런 나를 절대 혼자 보내지 않는다. 혼자 가겠다고 하면 삐쳐서 한 달 동안 말도 안 한다. 그래서 결국 “나 혼자 가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힘들어했다. 고작 1km 정도 데크길을 걸었을 뿐인데, 이미 죽을 상이다.
“잠깐… 잠깐만… 숨 좀…”
그런데 그 순간, 단체로 온 유치원생들이 선생님 손을 잡고 지나가며 노래를 불렀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숨 헐떡이는 남편을 보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도 힘내세요!”
남편은 그 아이에게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사람인 척했다.
‘이 인간은 50대 초반인데 할아버지 소리 듣고도 좋단다…’
바로 그때였다.
우지끈—!
갑자기 난간 쪽 로프가 끊어지면서 가래떡처럼 기대어있던 남편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남편은 슬로모션처럼 두 팔을 들고 만세를 하듯 추락했고, 나는 거의 날 듯이 달려가 소리쳤다.
“여보오오오오오!!”
다행히 계곡이 깊지 않았고, 남편은 떨어지는 중간에 로프를 잡아 큰 부상은 없었다. 다만 로프를 움켜쥐었던 두 손바닥이 완전히 까지고 여기저기 멍이 든 정도였다. 머리? 머리에 이상은 없을까? 여기서 더 이상해질 수도 있을까?
“아야…흐어헝”
남편이 까진 손바닥을 내밀며 울먹거렸다.
50이 넘은 어른이 손바닥 벗겨졌다고 우는 걸 보니 정말로… 모른 척하고 싶었다.
솔직히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남편이 하도 난리를 쳐서 결국 구조대에 연락을 했다.
10여분 후 구조요원들이 와서 상태를 보고 말했다.
“크게 다친 건 아니니 그냥 내려가시면 됩니다. 짐 같은 것 있으시면 저희 주세요.”
“짐이요? 없는데요?”
남편은 짐이 있으면 힘들어서 산을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 항상 내가 35L 배낭에 두 사람 짐을 다 넣어 들고, 남편은 빈손으로 따라온다. 정말 구조대원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창피했다.
남편은 손바닥이 아프다며 운전도 못 한다고 징징거리길래, 결국 렌터카 운전도 내가 했다.
어차피 평소에도 나만 한다. 남편이 겁이 많다 보니…
병원에서 CT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보니 딸에게서 부재중 전화 27통, 메시지 14개.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 올 것이… 왔구나.’
아침에 딸이 가쓰오부시 두 개를 먹었을 때부터, 그리고 아들이 조용히 중얼거릴 때부터, 나는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생활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다행히 CT촬영 결과 머리에는 이상이 없다 한다. 그래… 여기서 더 이상이 생기면 안 되지…
그때 남편이 붕대 감은 손을 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우리 오늘 흑돼지 먹기로 했는데… 나 상추쌈 어떻게 싸 먹지…?”
나는 은서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아빠를 닮은 오빠를 낳아서…
그때 ‘띵’하는 소리가 났고 남편이 갑자기 내 폰을 보며 말했다.
“어? 은서한테 문자가 왔네.”
15번째 문자 내용은 이랬다.
‘엄마, 지금 큰일 났어요. 도와주세요.’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 전화를… 일단 내일 생각하자. 왜냐면 지금 이 인간 하나 처리하는 것도 벅차니까.’
대신 은서에게 암호와도 같은 하나의 단어를 문자로 보냈다.
‘은서라면… 알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집에서는 마침내 전쟁의 북소리가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