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규칙

by 이야기여행자

“이게 뭐야…?”

가쓰오부시 사건이 있고 두 시간쯤 지났을까. 책을 읽다가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내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음식마다 스티커. 그 위엔 이름. 심지어 라벨지에 프린트해서 붙인 ‘궁서체’ 폰트도 다 똑같았다.

‘참나… 뭐야? 이 집단표기 시스템은.’

우유에도, 달걀에도, 김치통에도, 심지어 슬라이스치즈도 한 장 한 장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치즈에 어떻게 이름을 붙일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지? 시간이 남아도나?

나는 우유를 들고 엄마에게 쫓아갔다. 이런 유치한 상황은 빨리 알려주고 오빠를 응징해야 했다.


“엄마! 이거 봐요! 오빠가 음식마다 이름표 붙여놨어요!”

하지만 안방은 불길하게 조용했다. 침대 위 베개가 나란히 정리된 채 나에게 ‘무슨 일이야?’하는 듯했다.

그제야 생각났다.
오늘부터 3일간 부모님 여행 간다고 했던 말.
사건 직후 방 밖에서 들렸던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의문의 바스락 거림과 프린트기 소리도 이제야 퍼즐처럼 맞춰진다.

‘…그럼 3일 동안 나랑 오빠만? 집 안에서? 단둘이?’


그 순간,
등 뒤에서 쾌재를 부르는 오빠의 터질 듯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자. 규칙이야.”

오빠는 프린트된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A4용지인데, 제목이 [냉장고 운영 규칙 ver 1.0]이었다.

‘버전 관리까지 하고 있어. 미친 건가?’

“냉장고 앞에 붙일 거니까 숙지하도록.”

오빠는 종이를 냉장고에 붙였다. 삐뚤어졌다 싶으면 다시 떼서 붙이고, 또 삐뚤어지면 다시 떼서 붙이고, 그걸 다섯 번쯤 반복한 뒤에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성격 보이네… 그냥 대충 붙이라고!’

나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누구 맘대로? 안 해. 내가 왜 해야 하는데?”

오빠는 날 천천히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영화 악역 같은 표정을 지었다. 누굴 흉내 낸 것 같은데 비슷 근처에도 안 갔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 안 하면… 이 집의 평화는 끝이야.”

진심이다.
눈이 흔들리지 않는다.
저 사람 이제 단순히 헛소리를 넘어서 이미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느낌이다.

오빠가 발끝으로 발레 하듯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냉장고에 붙은 A4를 확인했다.

은서에게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는 오빠

[냉장고를 지켜라! ver 1.0]

1. 목적

부모님의 부재 기간(3일) 동안 평화롭게 지내기 위함


2. 규칙

본인 이름이 적힌 음식만 먹기(내꺼 먹으면 미워용)

상호 합의 시 음식 교환 가능(니가 잘하면.ㅋㅋ)

외부 음식 반입 금지(외부세력의 도움 싫어용)

위반 시: 상대방에게 음식 5개 반납(기대하마!ㅎㅎㅎㅎㅎ)


3. 점수 시스템

시작 점수: 100점

위반 시 즉시 -10점의 심판

3일 후 잔여 점수 높은 사람 우승


4. 상품

우승 상품은 비밀. (물어보면 알려줄지도? ㅋㅋ)


나는 A4를 보며 생각했다.

‘냉장고를 지켜라? 뭐야? 게임명이야? 진짜 이걸 어디에 신고해야 하나? 112? 아니지, 119인가?’


진짜 유치 찬란한데, 이 오빠는 이런 유치함에 ‘진심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일단 엄마에게 전화했다.
안 받는다. ‘제발 받아…’ 간절했다.

그리고 떠올랐다.
출발 전 엄마가 했던 말.

“제주도 가서 한라산 오를 건데, 연락 잘 안 될 수도 있어~”

…그 말을 이제야 기억해 낸 나도 문제다.

애초에… 스티커 따위에도 진심을 다하는 오빠인 걸 알고서도, 내가 가쓰오부시 2개를 먹은 게 국가재난과도 같은 비상사태를 초래한 것이었다.

그리고… 좀 전에 엄마가 나를 범죄자처럼 바라봤던 눈빛은… 사실은 불쌍한 제물을 보는 눈빛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도 문제였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오빠 방 앞에 섰다.
문틈 아래로 규칙이 여러 번 수정되고 보완되어 추가로 출력된 흔적이 보인다.
저 방에서 지금 게임이 계속 개발되고 있는 느낌이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말했다.

“오빠. 나랑 얘기 좀 해.”

문 안쪽에서 의문의 ‘딩!’ 하는 효과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시작된 느낌이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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