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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사쓰는 육아대디 Apr 06. 2024

2번의 수능, 639일의 군대, 입사

감사함이 자랑스러움으로

고등학교 3학년. 첫 수능에서 너무 쉽게 문제를 풀고 나왔던 나. 너무 쉽게 모든 함정에 다 빠져버린 탓에 수능을 제대로 망쳤고 대학 원서를 한 곳도 써보지 않고 바로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재수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아침 6시 기상, 아침 7시 10분 재수학원 차량 버스 탑승, 7시 50분 도착, 8시 첫 영단어 퀴즈로 하루 공부를 시작해서 밤 10시 30분 귀가. 밤 11시 30분까지 한강변 산책(지금은 하남 스타필드가 되어있다), 12시 취침. 특별한 날이 없으면 매일이 이 일정대로 움직였다.     


2차례에 지독한 슬럼프를 이겨내고 두 번째 수능을 봤다. 수능에 너무 집중한 탓일까. 시간이 남으면 수험표 뒷면에 내가 적은 답안을 적어서 가채점을 하고 예상 대학원서를 고민을 해야했지만, 내가 가지고 나온 수험표 뒷면을 깨끗했다. 그땐 '그래 차라리 시험을 잘 보는게 중요하지'라고 생각했는데, 학원 선생님들이 '도저히 예측이 안된다. 넌 결과가 나올 때까진 뭐 해줄 수 있는게 없다'라는 말을 했다. 사실이었고 난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가 나오는 날. 교육지원청으로 수능 결과를 받으러 갔고, 성적은 예상보다 잘 나왔다. 첫 번째 수능에선 대학 원서를 넣어보지도 못했지만, 두 번째 수능에선 내가 원서를 넣은 모든 대학에서 합격 소식이 날라왔다.     


흔히 재수생활을 했다고 하면 회사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이 물어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내 아들이 재수하려고 하는데~, 내 동생이 재수하려고 하는데~ 하면서 경험담을 듣고 싶어한다. 재수생활에서 기존보다 성적이 오르는 사람은 20%, 유지하는 사람은 20%, 떨어지는 사람은 60%라는 말이 있다. 온갖 유혹에 신분마저 불확실한 '재수생'이라는 입지가 공부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내가 경험한 재수생활이 쉽지 않았던 부분도 있어서 추천하지 않는다. 2번의 수능을 거친 탓인지 아직도 수능을 보고 나오는 학생들을 보면 참 대견스럽고 안쓰럽다.     


639일. 군대에서 보냈던 시간이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군대 문화와 질서, 말투까지. 체력의 한계를 수차례 경험하기도 했고, 영하 28도와 영상 38도의 강추위와 무더위를 견뎌냈던 시간들이다.(군대는 항상 덥고 춥다..) 선임들의 지독한 가혹행위와 폭력을 견뎌냈고, 내가 선임이 되어서는 동기들과 함께 이 부조리한 행위들을 끊어내고자 부던히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전역할 때 즈음에는 부대 내에선 이런 부조리한 문화들이 많이 사라졌다.     


처음 겪어보는 군대를 다치지 않고, 큰 사고 없이 전역한 것. 체력적 한계를 뛰어넘기도 하고, 날씨와 부딪히면서 견디고. 내가 겪은 부조리한 문화를 물려주지 않은 것. 이것만으로도 참 감사하고 잘 이겨내준 내 스스로를 격려하고 싶다.     


입사 후 수습과정을 거쳐 첫 리포트를 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주말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할머니를 만났는데, 방송에 나온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스마트폰을 들어 내가 제작하고 스탠드업(기자가 리포트 안에 마이크 들고 서 있는 모습)을 한 리포트를 보여드렸다. 그 모습을 보시고 환한 미소를 지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내가 방송국에 입사하고 싶다고 결심하고 공부한 뒤로, 할머니는 늘 '내 손자는 방송국에 들어갈 사람'이라며 주변에 말하고 다니시곤 했다. 수차례 탈락을 하는 과정을 보시면서도 단 한번도 '괜찮다'라거나 '다음에 기회가 있다' 등의 위로도 없이 그냥 믿어주셨던 분이다. 그런 할머니가 방송에 나온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그때 그 모습을 보여드렸던 순간, 미소를 지으시던 할머니의 얼굴이 내 머리 속에 스스로 자랑스러우면서도 슬픈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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