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아버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고 몸을 움츠린 채 걸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강원도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 한복판 종로구에 자리 잡은 우리 할아버지,
네 남매와 그들의 자녀들 대학 입학, 아니 그 이후까지 책임지고 계신 우리 할아버지,
손주들까지 돌보느라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일을 손에 못 놓는 우리 할아버지,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면서도 난방비가 아까워 보일러도 제대로 틀지 않는 우리 할아버지.
문득 할아버지가 걱정되어 눈물이 핑 돌았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건장하셨다. 어릴 적 우리 집 창문에 새가 날아들어 놀라서 소리치며 울었던 적이 있다. 그때 할아버지는 맨손으로 새를 잡고선 허허 웃으셨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든든했다.
할아버지는 공부를 손에 놓지 않으셨다. 한의원에 놀러 갈 때면, 늘 방 안에서 책을 읽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중국에서 한의사 자격증을 딴 게 늘 한이셨다. 뒤늦게 국내 한의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하셨고, 할아버지 논문을 컴퓨터로 옮기는 일을 도와드리면서 나는 용돈벌이를 했다. 논문 도와드리는 일로 할아버지를 찾아뵐 때면 할아버지는 나에게 갈비탕을 사주셨다. 그래서 지금도 회사 사람들과 갈비탕을 먹으러 갈 때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립다고 해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있다. 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무작정 찾아뵙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다.
"바빠서 오지는 못하겠지? 직장이 우선이다. 직장 생활 잘하고, 그러다 시간이 나면 놀러 오렴."
본인이 그러셨듯 일이 우선이라고 하는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주신 것만큼 드릴 수 없는 부족한 어른이 된 내가 미웠다.
여름마다 바다로, 산으로 여행 가길 좋아하셨던 나의 할아버지.
부디 제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갈 그날까지 건강하세요.
면허부터 따야겠다.
#2. 아빠
꽤 오랫동안 내 이상형은 '아빠 같은 남자'였다.
아빠는 자상하고 다정했다. 낭만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 아빠가 롯데월드 티켓을 주던 날이 기억이 난다. 학교를 다녀와서 집에 오니 집에 포스트잇이 붙어있었고, 포스트잇에 적힌 지령과 퀴즈를 따라가다 보면 내 책상 서랍에 롯데월드 티켓이 있었다.
지금도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건 아빠를 닮아 있을지 모른다. 아빠는 엄마와 연애시절 손편지와 시를 자주 적어 보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종종 엄마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건넸다.
낭만을 쫓던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그 재능을 집보다는 밖에 발휘하셨다.
그렇게 가정과 멀어져 갔고, 지금은 마주할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릴 때면 가끔 우리 집에 놓인 트리를 떠올린다.
산타의 존재를 믿게 하려고, 동생과 나의 머리맡에 선물을 놓는 장면을 녹화하해서 보여줬던 아빠가 생각난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기에 마음이 더 시린다.
가끔은 행복했던 기억이 나를 더 아프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도, 관계도, 추억도 유한하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영원히 행복하고 싶다는 그 욕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어서 빨리 우리 집에 놓여있던 트리 하나 놓을 수 있는 내 집을 마련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