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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n 27. 2022

161209-06

스크린도어에 낀 남자



군인 시절 화생방 훈련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올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단 1초라도 더 있었으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 1초가 지나기 전에 문이 열리고 바깥으로 아니 그래도 여전히 지하지만 어쨌든 지하철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5호선을 타고 여의도역을 지나서 더 가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내리는 신길역은 여의도역과 색깔과 모양이 비슷했지만 영 낯설었다. 여의도역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통과하고 다시 계단을 오르니 진짜 바깥이 나왔다. 역시나 한 정거장 차이인데도 여의도역과 신길역의 바깥 풍경은 많이 달랐다.      


주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보니 여의도역의 랜드 마크들이 눈에 들어왔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팀원들에게 어쩌다 스크린도어에 끼었고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설명하는 것보다는 헉헉거리며 들어가 '늦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재빨리 자리에 앉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 횡단보도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계속 뛰었다. 저 앞에 여의도역 기둥이 보이자 군대 시절 면회 온 여자 친구를 저 멀리서 보는 것만큼이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숨이 가빴지만 계속 뛰었다. 회사 건물로 들어와서 내친김에 계단으로 올라갈까 하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까지 올라가는 도중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12층에 도착했는데 사무실에 불이 아직 켜져 있지 않았다. 이상했다. 보통 월요일에는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서 12층의 경비 시스템을 해제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입구부터 불을 켠다. 분명 8시가 지났을 텐데 아직 어두운 것이 이상했지만, 안쪽 회의실에만 불을 켜놓고 회의를 하고 있나 보다 싶었다.      


출입카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그 순간 내가 가방을 두고 내리거나 지하철 선로 밑으로 떨어뜨려서는 안 되었던 이유가 생각났다. 가방 안에는 펜과 노트, 브로슈어와 책 말고도 출입카드 기능을 겸하고 있는 사원증과 7년 전 최종면접 합격을 통보받았던 날 그녀와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원증과 사진. 7년 동안 마치 부적처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을 뒤집어 넣어 놓고 화장실에서나 퇴근길 지하철에서나 그녀가 보고 싶으면 그 사진을 꺼내어 보곤 했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다 다시 뒤집어 사원증 뒤에 넣곤 했었다.


직원들 중에는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갈 때면 사원증을 자리에 두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출근해서부터 퇴근할 때까지 어떨 때는 퇴근하고 나서 집에 올 때까지도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나를 많이 찾았었다. “대리님~문 좀 열어주세요.”      


어떤 이에게는 소속감을 심어주고 어떤 이에게는 문을 열어주고 어떤 이에게는 벗어두고 싶은 그 사원증이 나에게는 그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21살에 처음 만난 우리는 그때부터 7년의 시간 동안 모든 처음 하는 것을 함께 공유했다. 첫 비밀일기, 첫 놀이공원 데이트, 첫 커플 자전거, 첫 기차여행, 첫 무박이일, 첫 해돋이, 첫 드라이브, 첫 캠핑, 첫 커플링, 매년 첫눈, 첫 면회, 당연히 첫 키스와 첫 경험까지도. 그리고 그 사진은 우리의 첫 폴라로이드였다.    

  

사진 찍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던 나 때문에 우리는 저 많은 처음들을 함께 하는 동안 사진 한 장을 안 찍었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행복한 표정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두 눈과 가슴속에 간직하면 된다는 것이 사진을 찍지 않는 나의 바보 같은 이유였다. 초반에는 계속 툴툴거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사진 얘기를 안 꺼내기에 그녀도 어느새 나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나 보다 했었다. 그런데 7년 전, 최종 합격 소식에 한껏 들떠있는 나에게 그녀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매일같이 볼 수는 없을 테니 만나는 날 꼭 사진을 한 장씩 찍고 날짜와 장소를 적어서 보관하자고 했다.     

 

너무나 간절하게 요구하는 그녀의 눈빛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 처음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커플 셀카를 찍고 그 밑에 <2015.12.15. 울지훈 0000 최종 합격 기념 여의도에서>라고 그녀가 적어 넣었었다. 그 사진은 그녀가 사 온 미니앨범 첫 장에 끼워진 채 그녀의 가방으로 들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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