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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05. 2022

161021-02

소리의 기억



귀걸이와 꼭 맞는 옷차림으로 집을 나선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철 3호선 역으로 걷기 시작한다. 집에서 3호선 역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지만 그녀는 이 시간을 참 좋아한다. 요즘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도 핸드폰을 보거나 이어폰을 꽂고 무언가를 듣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녀는 걸을 때는 오로지 앞을 보는 것, 그리고 딱 한 가지에만 집중한다. 자신의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 바로 귀걸이 소리이다.   

   

어떤 날은 가벼운 금속 두 개가 서로 부딪히며 찰랑찰랑 소리를 내고 어떤 날은 가늘고 긴 술들이 서로 스치며 소곤소곤 소리를 내고 어떤 날은 딱 달라붙는 귀걸이를 해서 특별한 소리가 나지 않는 날도 있다. 오늘은 걸을 때마다 링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는 소리와 에메랄드 빛 원석이 달랑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이런 날은 기분이 2배로 좋다.    

  

3호선을 타고 제일 끝 역에 내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40분쯤 간 뒤 다시 15분 정도를 걸어야 출판사에 도착할 수 있다. 긴 시간이지만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지하철역에서 버스정류장까지, 버스정류장에서 출판사까지 중간중간 걸을 때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귀걸이 소리에 집중하면 그 시간도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녀는 부쩍 기억력이 저하되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번역을 할 때 일반적인 번역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번역해야 할 문장을 직접 읽어 그 소리를 녹음한 뒤 녹음된 내용을 들으며 한글로 문장을 만들어간다. 번역이라기보다는 동시통역에 더 가깝다. 그러다 보니 똑같은 분량이어도 일반적인 번역가에 비해 2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그녀만 알고 있는 것인데 남들보다 시간이 배로 걸리더라도 자신이 읽은 문장을 다시 듣는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비록 자신의 목소리이지만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눈앞에 보이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인지, 반대로 자신의 목소리로 들리는 단어가 한글로 어떤 뜻인지가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전자 사전을 켜고 스펠링을 하나하나 쳐서 발음을 들어보거나 자신이 발음했던 단어의 스펠링을 유추하여 한글로 변환해보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자연히 번역 속도가 느려졌지만, 오빠의 출판사에서 번역 작업은 주된 것이 아니기에 그녀의 느려진 번역 속도를 그 누구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녀 역시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한 가지로 그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얼마 전 출판사 가는 길에 지하철을 내려 몇 번 출구로 나갔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 한참을 계단 아래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오빠나 아니면 출판사에 전화해서 물어볼까 했지만, 늘 오는 길인데 왜 묻는지 의아해할 것 같아 하지 못했다. 지하철 역 직원에게 버스 타는 곳을 물어볼까 했는데 그 순간 버스 번호도 생각이 안 나서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그렇게 그녀 스스로도 이상해서 한참을 서 있다가 좀 걸으면 생각이 나겠지 싶어 무작정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가 한참을 걸었다. 걸으면서 귀걸이 소리에 집중했다. 그날은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동그라미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걷다 보니 문득 6번 출구, 92번 버스가 생각났다. 출판사에 도착하니 또래의 여직원이 맞아주었다.      


오셨어요? 오전에 안 오셔서 저희는 내일 오시는 줄 알았어요.     


그제야 시계를 보니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집에서 출발해 중간중간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오는 곳인데 5시간이 훨씬 넘어서야 출판사에 도착했던 그날, 그녀는 느꼈다. 그녀의 뇌 속에서 어떤 것들이 서서히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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