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우히어 Jul 04. 2022

161021-01

소리의 기억




알람이 울리기 직전 잠에서 깨어 스스로 알람을 해제하고 머리맡에 두었던 물을 마시고 화장실로 가서 씻고 머리를 말리고 속옷을 입고 어젯밤에 냉동실에서 꺼내 두었던   조각과 우유 한잔을 마신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5 남짓. 지금부터가 그녀의 외출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보통 여자들은 그날 입을 옷을 고른 후 그에 맞춰 화장을 하거나 귀걸이, 목걸이 등의 장신구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반대다. 그날 할 귀걸이를 먼저 고른 후 그에 맞춰 옷을 입고 화장이랄 것도 없는 화장을 한다.    

  

방 2칸짜리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개수로 가장 많은 것은 책 다음으로 귀걸이이다. 방 한 칸은 서재로 두 개의 벽면에 책이 꽉 차 있고 나머지 면에는 책상과 오디오가 놓여있다. 다른 방에는 침대와 옷장 그리고 화장대가 있다. 그 화장대 옆에 액세서리 샵을 방불케 하는 귀걸이 보관대가 있다. 얼핏 봐도 귀걸이는 그 숫자만으로도 놀라움을 주지만, 색상별 그리고 스타일별로 분류되어 있는 그 정갈함에 한 번 더 놀라움을 준다.     


그녀가 가진 물건들은 대부분 무채색 계열의 심플한 것들뿐이다. 얼마 안 되는 그릇들도, 침구도, 옷장 속의 옷들도, 신발장 속의 신발들도, 거실의 소파와 쿠션도, 심지어 책장에 꽂혀있는 책의 표지들에서도 화려한 색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귀걸이 보관대는 마치 36색 크레파스를 보는 것처럼 다양한 색의, 그리고 도저히 한 명의 물건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의 귀걸이로 가득 차 있다.  

    

외출하는 날이면 씻을 동안 내내 어떤 귀걸이를 하고 나갈지 생각해본다. 오늘은 중간에 에메랄드 색 둥근 원석이 달려있는 금색 링 귀걸이로 결정했다. 귀걸이가 결정되면 그 뒤는 일사천리다. 중간 길이의 청치마와 흰 나시티 그리고 마 소재의 흰색 재킷을 입고 에메랄드 색 얇은 스카프를 매고 흰색 가방에 흰색 캔버스 화를 신는다. 옷이 많은 편이 아니기에 계절별로 귀걸이에 맞는 옷이 정해져 있다. 지금 같은 초여름 날씨에는 오늘 고른 귀걸이에는 이 옷차림이 딱이다. 일어난 지 30분도 안되어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그녀는 올해 35세. 너무 늙지도 그렇다고 마냥 어리지도 않은 나이. 주변의 또래 여자들 중에는 벌써 결혼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된 경우도 많고, 아니면 곧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남자와 연애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녀는 그 어떤 상태도 아니다. 혼자 살고 있으며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없고 만나고 있는 사람도 없고 하다못해 썸을 타고 있는 사람도 없다.      


성인 여자의 상태를 배우자 또는 애인의 존재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있는 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직업을 이야기할 때 정규직이냐 계약직이냐 또는 4대 보험이 적용되느냐 아니냐 또는 월급이나 연봉이 얼마냐로 설명하곤 한다. 그녀는 정규직이 아니고 그렇다고 계약직도 아니지만 직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자신의 직업명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굳이 언젠가 어딘가에 직업명을 적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재택 번역가가 적당할까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다.      


친오빠가 운영하는 출판사로부터 비정기적으로 요청받는 번역 작업이 그녀의 일이다. 하지만 근로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번역료도 그때그때 회사 사정에 따라 다르니 월급이 얼마인지 그녀도 정확히 계산해본 적이 없다. 4대 보험은 당연히 적용이 안 되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지난 8년 동안은 물론이고 그 전에도 병원을 갈 만큼 아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건강보험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녀이다.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모두 그녀의 삶에서 크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직업이나 결혼 유무 외에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요소는 외모일 것이다. 165cm의 키에 48kg의 몸무게. 보통 여성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지만 특별히 외모로 주목받은 적은 없다. 조금만 신경 써서 관리하고 화장을 더 돋보이게 한다면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외모이지만 마사지는커녕 천 원짜리 팩도 사용해 본 적 없고, 색조화장은커녕 아이라인조차 안 그리는 그녀이기에 예쁘다거나 매력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161209-0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