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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06. 2022

161021-03

소리의 기억




그녀는 작업한 번역물을 가지고 출판사에 가는 일 외에는 거의 대부분 집에서 지내지만,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는 꼭 영화관에 직접 가곤 한다. 많은 현대인들이 취미 란에 가볍게 쓰는 영화 감상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취미생활인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영화 감상에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 외에 집에서 컴퓨터나 티비로 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녀에게 영화 감상은 오로지 영화관에 가서 직접 보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러 가는 날에는 귀걸이 보관대에서 제일 화려한 귀걸이가 그녀의 동반자가 된다.   

   

처음 본 아니 처음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는 뤽 베송 감독의 ⌜레옹⌟이다. 그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이었고 그녀는 10살인가 11살이었다. 그녀보다 9살 많은 오빠가 어느 날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오더니 자기는 들어가게 하고 거실에서 혼자 영화를 봤다. 오빠가 보는 내내 방문에 귀를 대고 있다가 영화가 끝나고 오빠가 잠든 후, 혼자 거실에서 음소거를 한 채 영상으로만 봤던 그 영화.      


그때 그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2시간 전에 귀로 들었던 영어와 불어가 2시간 후에 소리 없는 영상에 그대로 입혀지는 경험. 알아듣지도 못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외국어였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전에 들었던 그 음성 그대로 배우들의 입모양과 합쳐져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들렸던 경험. 마치 바로 옆에서 그녀 귀에다 대고 배우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경험으로 인해 그녀는 스스로 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영어와 불어를 소리로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 뜻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영어와 불어를 공부했다. 영어는 AFKN 채널을 통해 접할 수 있었지만 불어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에게 부탁해 프랑스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밤새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틈만 나면 AFKN 방송과 프랑스 영화를 보다 보니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쯤엔 웬만한 영어와 불어는 다 알아듣게 되었고, 영화를 보는 그녀만의 안목도 제법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영어와 불어의 문장을 듣고 번역을 하는 것으로 경제활동을, 가끔씩 영화를 보는 것으로 취미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의 어느 날, 칸영화제 개막작 ⌜아네트⌟가 개봉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프랑스의 대표 여배우 마리옹 꼬띠아르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영화였다. 상영극장을 알아보고 집에서 가는 길을 알아보고 예매 시작일을 확인하고 예매를 하고 드디어 그날이 되었다.      


항상 그렇듯이 알람이 울리기 직전 알람을 해제하고 물을 마시고 화장실로 가서 씻으며 오늘 어떤 귀걸이를 할지 생각해봤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 어울릴만한 귀걸이를 떠올리는데 평소와 다르다. 평소에 영화를 보러 가는 날에는 계절과 날씨, 영화의 장르와 나오는 배우들, 영화관이 있는 장소 등을 떠올려 보면 어울릴만한 귀걸이 2~3개가 추려진다. 2~3개 중에 머리를 말리면서 최종적으로 1개를 결정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다 씻을 때까지 추려지지가 않는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에도 집에서 영화관 가는 동선, 영화 시작 시간 같은 것만 자꾸 맴돌고 오늘 해야 할 귀걸이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결국에는 속옷을 입고 귀걸이 보관대 앞에 서서 맨 왼쪽 위부터 맨 오른쪽 아래에 있는 귀걸이를 하나씩 다 훑어본다.      


문득 시계를 본다. 영화 시작 시간 10분 전에 입장하려면 5분 안에 출발해야 한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옷을 먼저 입을까 했는데 귀걸이가 안 정해지니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도 더더욱 모르겠다. 급한 대로 최근에 잘 안 했던 파란색 역삼각형 밑에 흰색 동그라미가 붙은 형태의 귀걸이를 꺼내 든다. 딱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영화 시간에 맞추려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귀걸이를 정하고 나자 다행히 그 뒤는 일사천리다. 흰색 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흰색 에코백에 흰색 운동화.      


다행히 타려고 했던 지하철을 시간에 맞추어 탔다. 보통 걷지 않을 때 그녀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있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움직이는 지하철에 앉아있는 동안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계속 귀걸이에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괘념치 않는 맞은편 사람들의 스쳐 지나가는 시선조차 자신의 귀걸이를 보는 것인가 싶어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빨리 내리고 싶다는 생각과,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다른 귀걸이를 하고 나올까 라는 생각과, 지하철역에서 몇 번 출구가 영화관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생각들로 뒤엉켜 있다가 도착역 문이 열리고 닫히기 직전 황급히 내리다 핸드폰을 지하철 안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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