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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10. 2022

161021-07

소리의 기억



영화를 보고 온 이후, 그녀가 번역해야 할 분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양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체감하는 양이 늘어났다. 그 전에는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를 번역하는 일에 집중했던 그녀지만 요즘에는 하루에 거의 14시간 이상을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게 해도 예전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    

  

번역본 제출에 대한 독촉을 받은 적이 없는데 어제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나 했니? 이번 주 안으로 가능할까?”

“응. 최대한 맞춰볼게.”

“출판사로 나오기 힘들면 내가 직원 보낼 테니까 하는 대로 연락 줘.”

“응……”

“너 요즘 무슨 일 있니?”

“아니 집중이 잘 안 돼서 그래. 괜찮아.”

“그래, 잘 챙겨 먹고. 집에만 있지 말고 바깥바람도 좀 쐬면서 해.”

“응.”     


그날 이후, 그는 가끔 문자를 보냈다. 딱히 답을 해야 하는 내용은 아니라 그녀는 그냥 스치듯이 보아 넘겼다. 그러다 번역 막바지 작업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 집으로 찾아온 출판사 직원에게 겨우 원고를 넘기고 쓰러지듯 누웠는데 문자가 왔다.  

         

  ⌜나의 끝, 당신의 시작⌟

  독일 영화인데 보러 갈래요?     


나의 끝, 당신의 시작?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해보아도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잠이 들 것 같지도 않았다. 나, 끝, 당신, 시작.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알겠는데 전체적인 뜻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러자고 대답했다.      


씻고 머리를 말리고 속옷을 입고 귀걸이 보관대 앞에 섰다. 어느샌가 씻을 동안에 그날 할 귀걸이를 생각하는 것도 힘든 일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귀걸이 보관대 앞에 서서 죽 보고 하나를 골랐다. 지금은 늦가을이니까 골드색과 와인색이 섞인 나뭇잎 모양의 길쭉한 귀걸이를 골랐다. 이 귀걸이에는 베이지색 치마와 와인색 쫄티와 카디건 세트, 갈색 가방과 베이지색 운동화가 딱이다.  

    

그녀가 귀걸이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짝꿍이었던 수영이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머리를 살짝 귀 뒤로 넘기며 큐빅이 박힌 반짝거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때 그녀는 두 가지에 놀랐다. 귀를 뚫고 학교에 귀걸이를 하고 온 수영의 대범함에, 반짝이는 귀걸이와 함께 더 반짝이던 수영의 얼굴에.      


그전까지 그녀에게 귀는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 귀를 다친 엄마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어릴 때부터 귀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아직 추워지기도 전부터 그녀의 엄마는 귀마개를 하고 다니게 했고,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귀 뒤로 머리를 넘겨 머리띠를 할 때도 그녀의 엄마는 볼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귀를 덮어주곤 했다.      


또 그녀에게 귀는 아빠와 엄마 사이의 싸움의 원인이었다. 아빠는 술만 마시고 오면 잘 못 듣는 엄마를 심하게 구박하곤 했다. 들리면서 일부러 못 듣는 척하냐, 들리지도 않는데 귀는 뭐 하러 달고 다니냐, 네 귀만 보면 화가 난다면서 어떤 날은 엄마의 귀 주위에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엄마의 청력이 안 좋아진 데는 아빠의 손찌검이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런 날들 속에서 그녀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귀를 드러내지 않고 보호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수영의 귀에서 반짝거리는 그것을 본 이후, 귀도 꾸미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귀에도 반짝이는 그것을 달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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