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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l 11. 2022

161021-08

소리의 기억



늘 다니던 극장이 아니라 도착이 조금 늦었다. 이미 자리를 알고 있었기에 바로 상영관으로 들어가니 옆자리에 그가 앉아있었다.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영화가 바로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이번에는 밥을 먹으러 근처 음식점에 들어갔다. 역시나 대화는 지난번처럼 그가 주도하고 그녀는 추임새만 넣을 뿐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이 남자와 영화를 보고 밥을 먹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의 목소리를 꼭 녹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귀걸이도 정말 잘 어울리네요. 지난번에 그것도 참 잘 어울렸었는데……”     


오늘 한 귀걸이가 뭐였지? 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살짝 고개를 흔들어 본다.      


“아니라고요?”

“아……아니, 오늘 한 귀걸이가 생각이 안 나서.”

“흔들어보면 알 수 있어요?”

“네. 소리를 들으면……”

“거울을 보면 되잖아요.”

“소리를 들으면 다 기억이 나요. 아……. 지난번엔 뭐였죠?”

“귀걸이요? 흰색이랑 파란색으로 된 거, 파란색 세모 밑에 흰색 동그라미.”

“아 그날 영화를 봤죠. 아네트. 그날 내가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아 그래서 그날 당신이……”    

 

그가 귀걸이를 기억해 준 덕분에 그날 입었던 옷도, 그날 봤던 영화도, 그날 있었던 일도, 그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도 기억이 났다.    

  

“고마워요. 내 귀걸이 기억해줘서.”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앞으로도 내가 기억해 줄게요.”     


그 말이 고마웠다. “기억해 줄게요.”라는 그 말이. 자신이 점점 잃어가고 있는 많은 기억들을 어쩌면 그를 통해 조금은 붙잡아 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를 만날 때만큼은 지난번에 자신이 무슨 귀걸이를 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얇은 네임 펜을 찾았다. 그리고 파란색 세모 밑에 흰색 동그라미가 붙어있는 귀걸이가 꽂혀있는 곳에 <아네트>라고 적었다. 오늘 했던 귀걸이를 자리에 꽂고 <나의 끝, 당신의 시작>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영화예매내역을 확인한 후 그날 했던 귀걸이가 생각나면 그곳에 그 영화 이름을 적어놓았다. 저장되어 있는 예매내역은 총 14개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날 한 귀걸이를 기억할 수 있는 영화는 5편뿐이었다. 나머지 9편은 그날 한 귀걸이는커녕 영화의 내용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핸드폰 어플 속에만 기록되어 있는 자신의 기억이 씁쓸했지만 7개의 영화 이름이 적힌 귀걸이를 보며 위안을 삼았다.      


오빠에게 부탁해 번역 작업의 양을 반으로 줄였다. 반으로 줄이고 나자 어느 정도 예전 같은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와 5편의 영화를 더 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차마 허락은 구하지 못한 채 만날 때마다 그의 음성을 녹음했다.      


그는 볼 때마다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그녀가 신선하다고 했다. 자신도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 그녀를 만날 때마다 설렌다고도 했다.      


해가 바뀌고 추운 겨울이 지나 한창 여기저기 벚꽃이 만개한 어느 날, 그에게 문자가 왔다.      


  내일 영화 말고 벚꽃 보러 갈래요?     


그 문자를 보는 순간, 8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영화관 말고 놀이공원을 가자고 했던 과일가게 청년. 난생처음 남자와 놀이공원을 갔던 그날 엄마가 죽었다.     


해마다 4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벚꽃을 보러 여의도로, 석촌호수로, 안산으로, 저 멀리 진해로 간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만 항상 접해왔던 그녀다. 그리고 티비를 통해 만개한 벚꽃과 그 아래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저 무성한 벚꽃 아래 서 있을 수 있을까? 생각만 했었다.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무성한 벚꽃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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