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세

2018년 10월 20일의 나

by 나우히어



그가 체득한 것은, 여러 인간들이 한 인간에 대해 과오를 범한다는 것, 인간이랑 모름지기 인간들에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겐 상처를 받아 우울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누구나가 타인에 의해 죽고 싶도록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체험뿐이었다. 또한 바로 그 자체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상심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임에도,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대한 체험이었다.(18p)



지금껏 그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타인들과 어울려 허비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는 시간을 이용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자기 편으로 구부려놓고는 시간의 향내를 맡았다. 그는 시간을 즐기게 된 것이다 시간의 맛은 순수하고 좋았다. 그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하고 싶었다.(25p)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또는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야말로 도대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떤가를 그는 오랫동안 몰랐다. 지금 그는 무슨 일을 하든가, 표현을 할 때마다 자신을 믿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신뢰를 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자기가 증명할 수 없는 일, 자기 피부의 털구멍이라든가, 바다의 짠 맛, 과일 같은 대기라든가, 단적으로 말해 일반적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도 그는 신뢰하게 되었다.(68p)



책을 읽은 후 지금과 같은 방식 - 한글파일에 인상적인 구절을 기록하여 작가명-작품명의 이름으로 저장해놓기 - 의 나만의 필사를 시작한 것이 2년 하고도 3개월 전(2018년 10월 기준)이다. 그 전에도 물론 다양한 방식으로 여기저기에 기록을 했었지만 2016년 여름부터 시작한 지금의 필사의 장점은 무엇보다 한 곳에 모아 놓을 수 있어 그동안 내가 읽은 책의 목록을 한눈에 시간 순서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언제든 파일을 열어 내가 뽑은 책의 핵심만 다시 읽어볼 수도 있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무엇에라도 집중을 하고 싶어서 시작했던 일인데 그렇게라도 정리하고 모아둔 덕분에 지금 나의 블로그를 채워가는 요리 재료가 쌓여있는 것 같아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다. 물론 블로그에 쌓이는 글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느낀다. 냉장고에 아무리 신선한 재료가 많아도 그 재료를 손질한 후 혼합하고 적절한 양념을 가미하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타인에게 내놓는 것은 또 다른 노력과 능력을 요하는 일임을.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 인상적인 구절을 입력하는 것을 필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필사를 하다 보면 비슷한 분량의 한 권의 책에서 기록되는 구절의 양은 작가별로 작품별로 천차만별임을 알게 된다. ‘양보다 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기록한 양이 많았다고 반드시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나의 기준에서는 대체적으로 저장한 파일의 용량이 큰 작품이 신선하거나 귀한 재료이다.



최근에 표지가 비슷한 독일 여류 작가의 작품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위의 책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재료 손질도 제대로 되지 않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이다. 400 페이지 정도의 생의 한가운데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다 기록하고 나니 그것만 글자 포인트 10으로 8페이지가 되었다. 웬만한 단편소설을 넘어서는 분량이다. 그래서 그 책은 다시 읽어보며 누가 한 말인지를 분류하고 인물별로 정리를 해보고 싶어 져서 내장도 분리안 한 채 냉동실에 들어있는 오징어와 같은 상태로 잠깐 보관하고 있다.(4년 동안 보관 중이니 이제는 꺼내서 버리던지 살리던지 해야겠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는 단편이다. 내가 읽은 책 기준으로는 9페이지에서 시작해서 69페이지에서 끝나는 60쪽짜리 단편. 그런데 이 작품도 인상적인 구절을 기록하고 보니 글자 포인트 10으로 2페이지가 되었다. 그 양도 양이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다 의미 있어 아직 통찰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감상문을 대체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어렵기만 하다.



이 글이라도 시작을 했으니 끝맺음을 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어지럽기만 하다. 창밖은 바람이 거세게 불고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다. 2층에 앉아있는 덕분에 사람 얼굴보다 큰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바로 눈앞에서 무질서하게 흔들리고 있어 더더욱 집중이 안 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겠지.



전체를 못 보면 부분이라도 봐야지. 어떤 부분을 선택할지조차 너무나 어렵지만 딱 한 부분에만 집중해봐야겠다.



<그대는 오로지 방정식을 풀 따름이다. 세계란 어쨌든 풀리는 방정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풀리고 나면, 금은 금으로서, 오물은 오물로서 제 위치를 찾는다. 하지만 그대의 가슴속과 같은 것, 그대의 가슴속에 세계와 비길 것은 아무것도 없다.(35p)>



학부에서 나의 전공은 수학이었다. 그만큼 나는 어찌 보면 수학 문제처럼 이 작품 속 표현으로는 방정식처럼 푸는 방식이 꼭 한 가지는 아니더라도 정해져 있고 답은 오로지 하나인 세계를 좋아했고 그 안에서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세상, 이 삶은 그렇게 단순하거나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방정식도 1차에서 2차를 거쳐 3차, 4차로 단계가 올라가면 또는 지수, 로그, 삼각함수 등과 결합되면 꽤나 긴 과정을 거쳐 힘들게 풀어야 하는 것들도 있지만 결국에는 풀리게 되어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과연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을 다 구할 수 있는가? 사실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까. 누구에게나 오늘 하루는 새로운 날이니까. 매일매일이 처음 접하는 새로운 유형의 심지어 답도 없는 문제들이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흘러가는 대로 오늘 하루에 충실하는 삶 속에서 자꾸만 더 나은, 더 가치 있는, 더 바쁜 삶을 욕망한다. 막상 그렇게 살면 또 지금의 이 시간을 그리워할 거면서.(그때보다 더 나은지 더 가치 있는지는 모르겠고 더 바쁘기는 한 지금 그때가 막 그립지는 않은 거 보니 역시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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