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죽어감

2018년 11월 3일의 나

by 나우히어



아이들이 죽어가는 환자가 있는 집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고 모든 대화와 토론, 두려움에서 소외되지 않을 때, 아이들은 자신들의 슬픔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 자신도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애도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아이들은 위안을 얻는다. 그런 경험은 아이들로 하여금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게 하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할 뿐 아니라, 성장하고 성숙해지도록 돕는다.(38p)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에 관련된 문제에 직접 부딪치기 전에는 어떻게든 그러한 질문과 사안들을 회피하려 애쓰며 살아가지만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진다. 이 문제는 대단위로 처리될 수가 없다. 컴퓨터로 대체될 수도 없다. 이것은 결국 한 인간이 혼자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우리 모두가 결국에는 조만간 이 문제와 대면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죽음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여러 면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다.(56p)


베텔하임 박사 “유아기는 어떤 요구도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은 모두 제공되는 시기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유아기를 수동의 시기, 오직 자기 자신만이 전부인 1차적 나르시시즘의 시기로 본다.” 그렇게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일하고 보상받고 즐기고 또 고통받고 난 뒤에,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그 단계로 돌아가고, 생애주기는 그렇게 마무리된다.(212p)




죽음과 죽어감.

제목 자체가 주는 진지함과 묵직함이 책의 표지를 여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독서모임 선정도서여서 읽어야 할 의무감이 있기도 했지만, ‘죽음과 죽어감’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주제여서 그랬던 것 같다. ​


돌아보니 나의 어린 시절, 정확히는 8살 말부터 12살 중반까지 삶과 죽음, 생명력 넘치는 어린아이들과 생명이 다해가는 어르신들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살았던 것이 나로 하여금 남들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어찌하여 그 시기에 내가 그러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나의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주는 일종의 비밀이라 아직은 공개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이 인생의 바닥에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모험과도 같은 삶 덕분에 나의 인생이, 나의 생각이 적어도 죽음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조금은 더 현실적이 되었다는 것은 밝힐 수 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아이들에게 쉬쉬하거나 거짓말로 위안을 주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작가의 생각에 너무나 동의한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평상시와 다름없었던 할아버지가 다음 날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흰 천에 덮여 방에서 실려 나오는 것을 어린 시절에 보는 것은 생각보다 큰 충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어 육체적 기능이 다하면 죽는 것이구나’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죽어가는 부모를 맡겨놓고 얼굴 한번 안 비치다가 마지막 순간에 시설에 생트집을 잡는 자식들부터 자주 찾아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직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자식들까지 접하면서 이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 유형이 있고, 더 다양한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있으며 후자의 자식들을 둔 부모들이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죽음으로 삶이 마무리되는 것이라면 나에게도 가족에게도 준비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보다는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남은 삶을 정리하고 내가 죽은 후에도 남아서 삶을 이어갈 가족들과 충분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죽음이 축복받은 죽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조금은 특별한 유년시절의 경험이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은 아니지만 문득문득, 아주 짧은 어떤 순간에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분명하다. ​


이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학, 간호학 및 관련 학문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그 분야에 종사하는 의료진들만이라도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현실적으로 집이 아닌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기를. 남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걱정, 아쉬움으로 고통을 억지로 견디는 마지막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이 전부인 1차적 나르시시즘의 상태"로 자신의 마지막을 "자유로이 기꺼이" 맞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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