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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Nov 05. 2022

161115-08

오늘 점심으로 카레를 먹을 수 있을까?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이 꺼려졌지만 지금 저 손은 나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덥석 잡고 다시 한번 더 조금 전과 같은 동작으로 몸을 위로 들어 올렸다. 전기기사의 허벅다리 옆에 내 얼굴이 놓인 자세로 나도 잠시 엎드려 있었다. 내 키가 작은 편이기는 했지만 전기기사의 키가 꽤 큰 것 같긴 했다.


괜찮아요? 고생했어요.


일단은 엘리베이터와 함께 추락하는 비극은 면했다는 생각에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냥 이대로 잠깐 눈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7층까지 걸어갈 수 있겠어요?

아, 네. 가야죠.


아!! 카레. 경비 아저씨. 지금쯤 설마 불을 껐겠지? 내가 이 안에서 이렇게 힘들게 나오는 동안 설마 도착했겠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계단을 올라갔다. 9층에서 10층을 올라가는 동안 현관 비밀번호가 생각났다. 경비 아저씨가 이미 도착했더라도 비밀번호를 모르면 들어갈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안에서 불이 났다면 현관을 통해 연기가 나올 테고 그러면 설마 119에 전화라도 했겠지 싶었다. 아직 소방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도착은 안 했나 보다.


13층에서 14층을 올라가는 계단인 것 같은데 위에 누군가의 엉덩이가 보인다. 꽤나 묵직하고 느리고 씩씩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처음에는 주민인 줄 알고 앞지르지 말고 그 김에 잠깐 쉬어갈까 싶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군청색 옷에 군청색 모자를 쓰고 있는 아저씨다. 경비 아저씨다.


아니 뭐야. 아직도 여기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아저씨, 아니 아직 여기에요?


아저씨는 뒤를 돌아 나를 흘끔 본다. 얼굴이 벌겋고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다. 너무 힘들어서 말도 안 나오나 보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 눈치다. 하긴 1702호로는 알겠지만 내 얼굴은 모를 수도 있다. 외출을 자주 하지도 않고 가끔 외출을 할 때 주로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다니니까. 그리고 굳이 외출할 때 경비실 앞을 지나면서 내 얼굴을 보여주고 나가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모자도 안 쓰고 안경도 안 쓴 상태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계단에서 제가 1702호 사는 사람이에요,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다가 지금 막 빠져나왔고, 제가 저희 집 불 꺼달라고 부탁했잖아요.라고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말없이 앞질러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아저씨 앞을 보니 뭔가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15층, 16층, 드디어 17층에 도착했다. 와 내가 걸어서 17층까지 왔다니. 아 정확히는 6층부터 시작했으니까 11층을 올라온 거구나. 그것도 쉬지 않고.   

   

현관으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지는 않았다. 현관 키 덮개를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침착은 했지만 손에 힘이 없었는지 번호 하나를 잘못 눌렀다. 덮개를 닫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열어서 번호를 눌렀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역시나 타는 냄새가 났다. 시커멓게 변한 주방을 볼 자신이 없어 현관에 잠시 서 있었다. 냄비 안의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너무 고픈데 시커멓게 변한 카레 대신 뭘 먹어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신발을 벗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시커멓게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주방은 멀쩡했다. 가스레인지 오른쪽의 키친타월도 그대로고 왼쪽의 나무 트레이도 그대로였다. 다만 냄비 바닥과 옆면만 조금 그을려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일단은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싶었다. 점심으로 카레를 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김치가 없어도 그냥 카레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잠시만 쉬었다가 전자레인지의 밥을 꺼내고 냄비 안의 카레를 꺼내 따뜻하고 촉촉하게 먹어야지 생각했다.


잠깐의 여유가 찾아오자 5년 전 이 집으로 이사할 때 17층이라는 것을 알고 엄마가 극구 말렸던 것이 생각났다. 평생 주택에서만 살아온 엄마였기에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해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이라는 숫자를 누르고 17층까지 도착하는 동안 엄마는 내내 안전바를 부여잡고 눈을 감고 입으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었다.


집 안으로 들어와서도 땅이 아닌 하늘에 붕 떠 있는 것 같다며 여기서 어떻게 사냐고 지금이라도 1층으로 이사할 수 없냐고 했었다. 나는 엄마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차갑게 쏘아붙였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엄마의 촌스러움을 어느 정도 무시했었다. 엄마는 그날 생각보다 빨리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 집에 온 적이 없다. 1년에 4번 계절마다 밑반찬과 김치를 꼬박꼬박 보내줬지만 한 번도 그것을 들고 찾아온 적은 없다. 가끔 통화를 할 때도 밥은 먹었나를 묻는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 고장 안 났나를 물었었다. 그리고 1층 집으로 이사 가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었다. 그 말만 나오면 나는 아우 됐어, 이사하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끊어. 뚝 했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마치 내가 아파트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엄마보다 훨씬 우월하고 잘난 딸이라는 자만감에 젖어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소동을 겪고 나니 갑자기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엄마 말처럼 땅이 아니라 하늘에 붕 떠 있는 것 같다는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아마 실제로 엘리베이터에 갇힌 채로 붕 떠 있다 와서 그 느낌이 더 생생했는지도 모르겠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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