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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Dec 05. 2022

160921-04


주연 #2     



“그럼 니가 하지 그랬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다. 남편이 저렇게 말할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나도 너무 후회돼.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게. 하지만 어떻게 모든 일을 다 내가 해. 아무리 집안일이 여자의 몫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것은 같이해야 하는 거잖아. 할 때 좀 제대로 확실하게 해 주면 안 되니?’



속으로 생각만 했지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은 적은 없다. 생각하는 모든 말을 다 했다면 아마 우리는 벌써 헤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 가정이 유지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과묵함 때문이다. 잘한 것도 없으면서 남편은 성질을 내며 나가버렸고 지민은 피곤했는지 아직 자는 눈치다. 밖에 분리해놓은 쓰레기를 남편이 나가는 길에 알아서 들고 갔기를 바라며 아침 준비를 한다.


나도 안다. 이사할 때마다 번번이 남편과 싸우게 되는 것을. 그래서 남편이 이사를 싫어하는 것을. 평상시에는 큰 다툼 없이 큰 갈등 없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따로 또 같이 매일매일을 지낸다. 하지만 이사만 하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큰 싸움을 하게 되고 그 여파가 꽤나 오래 지속되곤 했다. 보통 이사를 2~3년에 한 번씩 했으니 남편이나 나나 은연중에 2~3년 동안 묵혀왔던 서로에 대한 불만을 이사라는 스트레스 사건과 결합시켜 드러내게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엔 전세가 아니고 매매로,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선택하여 이사를 하는 것이니만큼 그동안의 이사와는 다르게 느껴졌고 그래서 이번에는 왠지 싸우지도 않게 될 것 같았다. 아니 싸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어제도 몸이 너무 힘들었지만 책 정리만 남편에게 부탁하고 주방 정리, 옷 정리, 화장실 정리, 지민이방 정리 대부분을 다 하고 마지막에 쓰레기 정리만 부탁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아침 준비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두 번째 이사를 떠올려 본다. 5년 전, 지민이가 4살 때였다. 계약 만료 3개월 전에 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전세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듣고 있던 터라 주인의 번호가 핸드폰에 찍히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4천만 원을 올려달라고 했고, 모아둔 걸 다 합쳐도 2천 정도밖에 안 되었던 상태라 대출을 받을지 조금 더 외곽으로 나갈지 고민을 하다 아직 아이가 어리니까 이번에 외곽으로 이사를 가고 나중에 다시 서울 가까이 오기로 결정을 했다.


그때 남편은 의견이 달랐다. 이사를 싫어하는 남편은 그냥 2천을 대출받자는 입장이었고 나는 이미 대출금이 많은데 추가 대출을 받으면 너무 무리니까 차라리 이번에 외곽으로 이사를 가면서 오히려 기존 대출금을 일부 값아 매월 나가는 이자를 조금 줄이자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결정된 이사다 보니 남편은 물론 그때 한창 일이 바쁠 때이기도 했지만 집을 알아보는 과정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았다. 네가 원해서 하는 이사니까 네가 다 알아서 하라는 태도였다.


부동산 업체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집을 보러 다니는 것도 지민이 어린이집 알아보고 입소신청을 하는 것도 이사 업체를 알아보는 것도 모두 내 몫이었다. 계약 만료 기간은 다가오고 이사 갈 곳은 정해지지 않았던 어느 날, 부동산으로부터 원하는 조건에 딱 맞는 집이 나왔는데 빨리 보러 올 수 있겠냐는 전화가 왔다. 하필 그날 회사에서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이어서 급히 남편에게 연락을 했고 마침 남편이 그 근처에 있어서 집을 보러 가게 되었다.



나는 남편이 혹시라도 놓칠까 봐 살펴봐야 할 것들을 문자로 일러주었고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회의 중간중간 사진을 보니 그동안 봤던 집들에 비해 상태도 좋고 무엇보다 이사 시기와 가격대가 딱 맞아 그날로 가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사하기 하루 전날,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이사를 나가고 나는 저녁 8시쯤 간단히 청소를 하려고 이사 갈 집에 가보았다.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이 나가고 자리 잡고 있던 짐들이 빠지고 난 집은 볼품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집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수압은 너무 낮고, 가스레인지는 4개 중에 2개만 작동이 되고, 다용도실 벽은 곰팡이로 도배가 되어 있고, 거실 바닥은 곳곳이 파여 있고, 방 문고리나 붙박이장 손잡이 등은 죄다 헐겁거나 아귀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안방에 딸린 드레스 룸과 화장실이 너무나 좁았다. 이미 계약을 했고 당장 내일 이사인 이 상황에서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와서 보니 집이 엉망이네. 그날 내가 물도 틀어보고, 다용도실도 꼼꼼히 보고, 가스레인지도 틀어보라고 했잖아. 안 해봤어?”

“물은 틀어봤는데 나머지는 못했어.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세세하게 보기 좀 그렇잖아.”

“그래도 우리가 살 집인데 좀 꼼꼼하게 봤어야지. 드레스 룸도 옷 반도 안 들어갈 것 같아. 화장실도 이렇게 작아서 여기선 샤워도 못할 것 같은데 그럼 아침에 시간 겹칠 때 어떡해.”


“나도 그날 업체 가는 길에 급히 들른 거라 오래 볼 수가 없었어. 이럴 거면 니가 와서 보지 그랬니.



‘그래 내가 와서 볼 수 있었으면 왜 안 봤겠니. 내가 안 되니까 너에게 부탁을 한 거잖아. 나 혼자 살 집도 아니고 같이 살 집인데 좀 내가 보라고 한 것만이라도 제대로 봐줄 수는 없었을까?’



결국 그 때도 저 말은 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침과 함께 식도를 타고 뱃속 아니 가슴 속 어딘가로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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