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우히어 Apr 30. 2023

마스크를 벗을 때가 왔나 보다

ISTJ로 보이는 ENFP



손가락으로 줄곧 튕겨도 그 속에 있는 받침대 때문에 결국은 평정을 되찾는 오뚝이. 그렇다면 내 받침대는 어떤 것일까? 사랑의 ‘힘’일까? -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이번 주말에는 오랜만에 취미활동을 할 시간이 생겼다. 바로 독서와 그에 이어지는 디지털 필사. 디지털 필사가 무엇이냐면, 책 속의 인상적인 구절을 노트에 펜이나 연필을 사용하여 손으로 직접 옮겨 적는 것 말고, 타이핑을 해두는 것을 일컫는 나만의 용어이다.      


어젯밤 그리고 오늘 계속 읽고 있는 책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이다.      


이런 사랑의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출처의 조각들을 가지고 조립하였다. 어떤 것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규칙적인 책 읽기에서 온 것이고, 또 어떤 것은 꾸준한 책 읽기, 우연한 기회에 행해진 책 읽기에서 온 것이다. 또 몇몇은 친구들과의 대화, 내 스스로의 삶에서 온 것도 있다. -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https://m.blog.naver.com/2gafour/223089351313



작가 스스로 책의 앞에서 밝힌 것처럼, 다양한 책의 구절과 주변인들과의 대화,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지루하지 않게 담아낸 글이다. 언젠가 나도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이기도 하다. 오랜만의 독서여서인지, 아니면 작가와 나의 어느 부분의 결이 같아서인지, 역시나 귀퉁이가 접히는 페이지가 자주 등장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내가 타이핑할 문장이 늘어날 생각에 흐뭇해지기 까지 했다. 어느덧 나는 문장수집가로서의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평정을 되찾는 오뚝이’ 라는 부분에 눈길이 머무르게 되었다. 보통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표현하는 오뚝이의 움직임을 평정을 되찾는다라고 표현한 것이 신선했고, 최근에 사람들이 나를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평가한 일화(?)가 떠올라서이기도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된 센터에 처음 출근을 했던 3월 초. 첫 일주일 동안 나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 동시에 매우 불안한 마음 상태였다. 바쁠거야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불안하기까지 했던 이유는 당시 센터에 고3 학생이 1명 있었는데, 고3 수업을 많이 해보지 않은 터라 아무래도 그 학생이 질문할 문제에는 바로바로 답을 해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수학의 선택과목 중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기하나 확통이 아니라 제일 자신이 없는 미적분이 하필 그 학생의 선택과목이어서 더 불안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마음속으로는 요동치던 나였는데, 그다음 주엔가 직원들끼리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 내 마음속 불안은 전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너무 침착하게 금방 적응하신 것 같아요!”

“엄청 능숙하게 학생들 잘 다루시던대요?”

“센터 근무가 처음이시라구요? 전혀 몰랐어요~”     


백이면 백은 아니고 나를 제외한 셋 모두 위와 같은 공통된 반응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마음속 불안이나 걱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남들이 보기에는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으로 나를 평가해 주었다.

      

조금 다르지만, 학생들이 나를 보는 시각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다.    

  

위에 언급한 고3 학생은 결국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나 때문에 결국 센터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 뒤에 새로운 고2 학생이 신규로 들어왔다. 고등학생이다 보니 아무래도 제일 늦은 타임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3월 중순까지는 저녁 8시 이후에는 그 학생과 나만 남아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가끔 잡담을 주고받기도 했는데(수다 떠는 것을 꽤나 좋아하는 학생이어서), 그 학생이 나보고 “쌤~MBTI ISTJ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매우 놀라며 “아니 나 완전 정반대인데, ENFP야.” 했더니 이번에는 그 학생이 매우 놀라는 것이 아닌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요,

어떻게 쌤이 엔프피일 수가 있죠?”     


“내가 이곳(일터)에서 특히나 청소년들 앞에서 나의 엔프피 성향을 많이 드러낼 일은 없지 않겠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 학생은 꽤나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이런 걸 바로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하는 거란다. 너도 차차 알게 될 거야~”라고 하며 그날의 잡담은 마무리를 했지만, 남들의 눈에는 아예 반대로 보인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꽤나 충격적이기는 했다.      


어느 정도 나 스스로를 좋은 쪽으로, 아니면 상대방에 맞는 방향으로 포장하는 능력이 꽤나 높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면 좀 지나친 건 아닐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아탐색의 오랜 주제인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일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계획적인 유형일 것이라고 남들이 여기는 나는 친구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감정이 요동치고 삶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상태이며 기나긴 계획 따위는 없이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회사일정에서 자신의 프로필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는 #겉바속촉 이라고 나를 표현했다. 그런 표현을 좋아하는 편이다. ‘첫인상은 차가운 편인데 알면 알수록 속이 깊어’라든지 ‘의외로 허당이네’ 이런 표현들은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즐겨하는 평가들이고, 나는 그런 피드백을 받을 때 엔돌핀이 마구 솟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생각했을 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닌데, 마치 나를 간파했다는 듯이 “넌 이렇잖아~”라고 단정 지으려 하면, 발끈하면서 “네가 본 모습이 다가 아니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 사이의 간극을 즐겨왔고, 그 간극은 분명 내가 만들어놓은 것일 텐데, 문득문득 그 간극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커져버리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살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요즘이다. 내가 만든 것이니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더 커지기 전에 줄이는 것도 결국 나의 몫이겠지.



내가 그어 놓은 선을 지우고, 쌓아 놓은 벽을 허물고, 악착같이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릴 때가 온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은 무엇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