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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n 11. 2024

160920-01

결혼 10주년

“응. 나야 통화 가능해? 알았어, 빨리 말할게. 바르셀로나야 유럽. 인당 38만 원이면 비행기 탈 수 있어. 숙박은 최대한 저렴한 데로 알아볼게. 그래 맞춰볼게. 매번 그래도 막상 여름휴가는 5일씩 냈었잖아. 앞뒤로 주말 끼면 다녀오고도 남아. 결혼하고 10년 동안 신혼여행 빼고 우리끼리 해외여행 한 번도 못 갔어. 약속했잖아. 결혼 10주년 때 유럽 가기로.”     



 회의 시작 5분 전. 브리핑을 하기로 한 차대리가 아이가 아파 오전반차를 내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보고를 하게 되었다. 함께 만든 자료이기는 하지만 부사장 앞에서 보고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머리가 하얘진다. 회의 장소에서 급히 자료를 훑어보고 있는데 핸드폰에 아내의 번호가 뜬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난 4분기에 이어 이번 1분기도 실적이 좋지 않아 분위기가 냉랭한 요즘 같은 때, 회의 시작 전 어색한 분위기 속에 있다 괜히 쓸데없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핸드폰을 들고 나온다.      


“어. 곧 회의 시작이야. 아무리 저렴해도 유럽 일주일 이상이면 꽤 나오지. 휴가 그렇게 길게 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아. 요즘 회사 분위기 안 좋다고 했잖아. 결혼 10주년이면 꼭 유럽 가야 하니?”      



또 유럽 타령이다. 결혼 10주년, 해외여행, 이왕이면 유럽으로. 연애할 때, 신혼여행 때 아내와 했던 이야기다. 그 후 매년 결혼기념일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 10주년 때는 꼭 유럽 가자 했었다. 사귈 때, 신혼 때 무슨 약속을 못하리. 함께 산 지 10년.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아내와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절대 가지 않겠노라고.     


사귀면 100일 기념여행, 1주년 기념여행을 가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이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드문 일이었다. 2년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와 나에게 신혼여행은 둘이 함께 하는 첫 여행이었다. 그래서 결혼 준비과정에서 신혼여행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었다. 나는 예산에 맞게 발리나 푸껫을 생각했지만 아내는 일생에 한번뿐인 신혼여행인데 동남아 말고 다른 곳을 가고 싶어 했다.



주변에서 다들 신혼여행은 아내 될 사람의 의견에 맞추라고 해서 우리 형편에 좀 무리였지만 다른 비용을 확 줄이고 5박 7일 하와이로 결정했었다. 아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실수였을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주변에서 하와이로 휴가를 간다고 하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할 정도로 하와이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을 신혼여행에서 잔뜩 얻어왔다.      



하와이를 5박 7일로 다녀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5박 7일이 우리 예산에서 가능한 최대치였다. 결혼식을 한 그날 밤 9시경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처음 예약할 때는 1시 식이니 6시까지 충분히 공항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식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난 시간은 거의 4시, 새벽부터 일어나 아무것도 못 먹은 우리는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입고 있던 한복을 갈아입고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부랴부랴 공항으로 가기 바빴다.



토요일 오후 도로는 꽉 막혀 7시가 되어서야 인천 공항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티켓을 발권하고 짐을 부치고 출국심사를 받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축의금으로 면세점에서 폼 나게 쇼핑하려고 했던 우리의 계획은 여권과 티켓을 손에 쥐고 51번 게이트를 찾아 뛰는 것으로 바뀌었다.      



힘들게 비행기에 타고나서도 고난은 계속되었다. 나도 아내도 9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영화 3편을 다운로드하여왔고 아내는 하와이 안내서 1권과 소설책 1권을 가지고 왔다. 나는 평소에는 안경을 쓰지만 결혼식 날이었던 만큼 안경을 벗고 일회용 렌즈를 꼈었고, 아내는 평상시에 외출할 때는 렌즈, 집에서는 안경을 썼었다. 그날 공항에 급히 도착해 정신없이 짐을 부치는 과정에서 아내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하나로 합치기로 하면서 각자의 가방에서 여권과 지갑, 휴대폰, 화장품 등만 꺼내고 안경은 큰 캐리어에 넣어버렸던 것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비행기가 출발한 저녁 9시까지 각자 눈에 끼어있던 일회용 렌즈는 수명을 다했지만 안경이 없는 상태에서 그 렌즈를 뺄 수도 그렇다고 낀 채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볼 수도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저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대고 있는 수밖에. 잠이라도 잘 수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상황은 좋지 못했다. 우리 바로 뒷좌석의 갓난아기는 계속 울어댔고 앞 좌석의 남자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바로 세웠다를 반복했고, 겨우 잠이 들 만하면 기내식을 준다,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라, 간식을 준다, 기내면세품을 사라고 하며 안내방송을 하고 스튜어디스들이 카트를 끌고 지나다니는 통에 정말이지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9시간 비행은 다시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호놀룰루 공항에 내려 여러 단계를 거친 입국절차를 통과한 끝에 캐리어를 찾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처음 눈에 들어간 지 24시간이 훌쩍 지나 거의 눈에서 저절로 떨어지기 직전의 일회용 렌즈에 아슬아슬하게 의존한 채 각자의 캐리어를 찾은 후 우리가 공항 바닥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닦지도 않은 손으로 렌즈를 빼고 안경을 찾아서 낀 일이다.      



힘들게 도착한 만큼 남은 여정이 조금만 평탄했더라면 그래도 아내와 함께하는 첫 여행,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신혼여행, 내 생에 처음 밟아본 미국 땅 하와이에 대해 좋은 기억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아내가 꼭 오고 싶어 했던 곳이었고, 나보다 더 꼼꼼한 성격이었기에 하와이에서의 일정은 모두 아내에게 맡겼었다. 사귀는 동안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닌데 한 번도 1박 2일로 가까운 곳이라도 놀러 갈 기회가 없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평일에는 하루에 3~4시간, 가끔 주말에 서로 시간이 맞으면 11시쯤 만나 밤까지 길어봐야 12시간을 같이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하와이에 도착해서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약 120여 시간을 둘이 함께 낯선 곳에 있는 것에 대해 어쩌면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일까. 여행 마지막 날 혼자 남겨진 호텔에서 아내가 짠 일정표를 보며 나는 2가지 생각을 했었다. 저 계획대로 다 하는 건 여행이 아니라 극기 훈련이라는 생각과 저 계획을 짜기 위해 아내가 혼자 얼마나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고민했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두 번째 생각으로 인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첫 번째 생각으로 인한 아내에 대한 숨막힘이 나에게는 더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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