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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n 12. 2024

160920-02

결혼 10주년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를 타자고 했지만 아내는 택시비가 비싸다며 굳이 버스를 고집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 거리였는데, 하루 이상 잠을 못 잔 상태에서 땡볕을 쬐며 캐리어를 끌고 걷는 것은 5분이 아니라 1분도 못할 짓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침대로 직행했는데, 아내는 그런 나를 두고 보질 못했다. 이미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30분 정도 지연이 되었기에 모든 시간은 아내의 일정표와 맞지 않았다. 계획은 계획일 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아내에게 계획은 시작부터 잘못되면 결국 마지막에 엉망이 되고 마는 셔츠의 첫 단추와 같은 것이었나 보다. 신혼여행이 계획대로 안 되면 앞으로 결혼생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었던 것일까. 이미 늦어진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그날 잠시의 휴식도 없이 우리는 돌고래 쇼를 보러 나갔다.



맛집이라는 곳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 겨우 저녁을 먹고 쇼핑센터에 들렀다 와이키키 해변의 가장 큰 호텔에서 하는 불꽃놀이를 보고 방으로 돌아오니 11시. 여행은 처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신혼 첫날밤이 정말 첫날밤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에게도 나름대로 신혼 여행지에서의 첫날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신혼 여행지에서의 첫날밤에 대한 나의 판타지는 그날 밤 나의 꿈속에서만 생생하게 펼쳐졌다.       



다음 날은 아침 7시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호텔 앞에서 8시 30분에 버스를 타고 하와이 원주민 마을로 갔다. 거의 하루 종일 그곳에서 공감대가 형성되지도 않고 현재 삶에 적용할 수도 없는 다양한 체험을 하고 해 질 녘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아내는 노을을 보며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예약해 뒀다며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고 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어느덧 한밤중. 그날은 나도 눈을 부릅뜨고 하와이에서의 정사를 치렀지만 그 직후 정말 죽은 듯이 그 자세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셋째 날은 숙소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어느 해변으로 가서 스노클링을 하고 다시 1시간 걸려 숙소로 돌아와 숙소 근처 해변에서 서핑 강습을 받고 패러세일링을 하는 일정이었다. 하루 종일의 물놀이가 끝나고는 또 다른 쇼핑센터로 가서 구경을 하고 선물을 사는 일정이 남아있었다.



넷째 날은 아침 9시에 예약한 렌터카를 받아 하루 종일 해안가 도로를 따라 달리며 비슷비슷한 해변을 구경하고 중간중간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정이었다. 차가 있다 보니 그날은 평소보다 더 늦게 숙소에 돌아왔다. 낯선 영어 표지판을 보며 손에 익숙지 않은 운전대를 잡고 하루 종일 신경 써서 운전을 해서인지 그날도 역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다섯째 날이자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 하루만큼은 늦잠을 자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8시도 되기 전에 깨웠다. 조식을 먹고 렌터카를 9시까지 다시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아침 안 먹을래. 조금만 더 잘게.”

“여기 조식 9시까지여서 지금 아니면 못 먹어.”

“더 자고 싶어. 그냥 조식 혼자 먹고 와.”

“신혼여행 왔는데 어떻게 조식을 혼자 먹어.”

“아 그럼 너도 먹지 말든가. 어제 하루 종일 운전했더니 너무 피곤하다 정말.”



나도 모르게 잠결에 아내가 듣기에 짜증 섞인 톤으로 말을 했었나 보다.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어?”



더 말을 했다가는 큰 싸움이 될 것 같아서 그냥 몸을 옆으로 돌리고 고개도 옆으로 돌려버렸다. 이내 아내는 화장실로 가는가 싶더니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이 들었었다. 옆방에서 나는 청소기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고, 아내는 없는지 조용했다. 휴대폰을 보니 렌터카 늦더라도 꼭 반납하라는 내용과 함께 반납해야 할 장소의 주소와 연락처가 남겨진 아내의 문자가 있었다.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꺼져있다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대충 씻고 옷을 주워 입고 키를 챙겨 렌터카 반납을 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저쪽 코너에 보이는 맥도널드에 가서 빅맥 세트를 하나 먹고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전히 꺼져 있었다. 12시. 신혼여행 마지막 날인데 이게 뭐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꼭 해야 할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가볍기도 했다. 어설픈 영어로 숙소로 가는 버스 타는 곳을 알아내고 정류장 근처 ABC 마트에서 아이스트림과 과자와 맥주와 육포와 땅콩을 마음껏 샀다. 숙소로 돌아와 마음대로 먹고 마시다 어느새 또 잠이 들었다.      



너무 고요해도 잠이 깰 수 있구나 싶을 만큼의 고요함 속에서 잠이 깼고 시간을 보니 저녁 8시. 창밖을 보니 이미 깜깜했다. 한심하게도 그제야 아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휴대폰은 꺼져있고, 대체 어디 가서 아내를 찾아야 하나 막막했다. 그렇다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캐리어를 뒤져보고, 하와이 책자를 살펴보다 침대 맡 테이블 위에서 아내의 일정표를 발견했다.



아내는 마지막 날까지 쉴 틈 없는 계획을 세워놨었다. 마지막 날의 계획은 조식 후 렌터카를 반납하고 버스를 타고 하나우마 베이라는 곳에 가서 2시간 정도 머물다 다시 버스를 타고 동물원에 가서 2시간 정도 구경을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와서 저녁을 먹고 장소를 이동해 야경을 보며 칵테일을 마시는 것이었다. 다른 날들에 비해 그래도 마지막 날이라 조금의 여유가 느껴졌지만 아내의 일정표에는 버스를 타는 곳과 버스의 번호, 내려야 할 정류장의 이름, 동물원의 입장료, 저녁식사 메뉴, 먹어봐야 할 칵테일의 이름까지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보고 있으니 우리가 신혼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하와이를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담당자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일정표 상으로는 저녁 8시 이후에는 칵테일 바에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어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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