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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n 16. 2024

160920-04

결혼 10주년


우리 부모님과 누나네 식구들과 함께 일본을 갔을 때는 정말 계획이랄 것이 필요 없는 온천하고 밥 먹고 온천하고 밥 먹고 하면 되는 온천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계획표를 짰었다. 심지어 고작 2박의 일정이었는데 숙소를 두 군데로 예약했었다.


첫째 날 숙소는 공항에서 버스로 거의 3시간 거리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온천호텔, 둘째 날 숙소는 그 호텔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전통 료칸.


4~5일 있는 일정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이틀 있는데 숙소를 하루씩 잡은 아내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출발하기 전부터 계속 불만이었고 심지어 첫째 날 숙소를 모두 마음에 들어 하기에 지금이라도 료칸을 취소하고 여기 하루 더 머물 수 있는지 알아보자고 아내를 설득하려다 서로 기분이 상하기까지 했었다.


다른 가족들은 우리 눈치를 보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하루만 있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아무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하고 버스를 타는데 그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나는 호텔보다 어둡고 좁고 잠자리도 불편한 료칸이 참 마음에 안 들었는데 다른 가족들은 아니었나 보다. 셋째 날 함께 아침을 먹으며 아버지, 엄마, 누나, 매형, 심지어 그때 당시 5살이었던 누나의 딸까지 모두 아내의 선택에 칭찬일색이었다.


“호텔은 호텔대로 료칸은 료칸대로 각자 개성이 있구나.”

“일본에도 그렇게 큰 호텔이 있는지 몰랐어요.”

“확실히 료칸에서 온천하니까 진짜 일본에 와 있는 느낌이 들더라.”

“다음에는 호텔에서 2박 료칸에서 2 박해요.”

“나도 일본 또 오고 싶어.”



시댁 식구들의 쏟아지는 칭찬에 아내는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아내에 대한 칭찬은 나에 대한 잔소리로 이어졌다.



“앞으로 너는 새아기가 하자는 대로 머든 해라.”

“부인이 이렇게 준비성이 철저하면 남편인 네가 편하지.”

“너도 이번 기회에 계획하고 준비하는 걸 좀 배워라.”



나의 가족들이 부인을 탓하는 것보다야 칭찬하는 것이 나도 좋기는 했지만 속으로 ‘2박 3일 온천여행이었으니까 이 정도예요. 신혼여행 때 일정 아시면 그런 말 안 나올 거예요.’ 했었다.


두 번째 처가식구들과의 3박 4일 홍콩, 마카오 여행 역시 임신 7개월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모든 계획을 짰었다. 역시나 걱정이 되었지만 설마 본인 몸이 무겁고 다리가 아픈 친정 엄마와 3살, 6살 조카들이 있는데 무리한 일정은 짜지 않겠지 하는 마음에 관여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홍콩 공항에 도착한 직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홍콩, 마카오는 주변에서도 워낙 많이 가는 여행지라 사람들에게 귀동냥을 많이 했었다. 3박 4일 일정으로 가면 보통 처음에 홍콩에서 2박 마지막 날 마카오에서 1박을 하면 된다고들 했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홍콩의 호텔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카오 가는 페리를 타러 이동하는 것이었다.


아내가 짠 일정은 마카오에서 2박을 한 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1박을 하는 것이었다. 아내도 나름 이유는 있었다. 이번에 마카오에 새로 생긴 호텔에서 오픈 기념으로 가족룸 할인행사를 했는데 2박부터 할인가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홍콩에서 먼저 1박을 하고 마카오로 둘째 날 넘어가도 되는 것 아니었나. 그 또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날 비행기 타기 전 홍콩에서 일정이 있기 때문에 3박째를 홍콩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 호텔 체크아웃 후 일정, 신혼여행이 떠오르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남들은 마카오는 워낙 작아서 반나절이면 다 볼 수 있다고들 하던데 아내가 짠 일정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장인어른과 장모, 형님과 처형까지 있는 상황에서 임신 7개월인 아내에게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어서 아내의 계획대로 마카오를 속속들이 구경하고 둘째 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각 혼자 나와 근처 호텔의 카지노장을 갔었다. 처음에는 돈을 좀 따다가 결국에는 다 잃고 더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새벽 3시쯤 나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3시간 남짓 잤을까.


셋째 날 일정이 시작되었다. 조식을 먹고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하고 페리를 타고 홍콩 호텔에 도착하니 아직 체크인 시간 전이었다. 그러게 뭐 하러 이렇게 일찍부터 서두르나 싶었는데 아내는 부모님에게 체크인한 후 방에서 잠시 쉬고 있으시라고 하고는 일정표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홍콩에서의 일정은 다음 날 오후 4시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홍콩 공항에서 정말 녹초가 되어 앉아 있을 동안 장인어른, 장모, 처형, 형님은 모두 아내에게 홀몸도 아닌데 일정 짜고 안내하느라 고생했고 덕분에 짧은 시간에 홍콩과 마카오를 많이 둘러볼 수 있었고 음식들도 다 맛있었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그때는 속으로 ‘내가 이상한 건가, 내 체력이 유독 약한 건가’ 싶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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