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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Mar 22. 2019

너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니, 정우야?



「걷는 사람, 하정우」


최근에 읽은 책 제목이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그 <배우 하정우>가  직접 쓴 글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블로그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하정우를 좋아하는지. 그의 대표 필모그래피 18편 중, 무려 12편을 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동안에는 그의 연기력이나 목소리, 까무잡잡한 피부 등 겉으로 드러나는 면 때문에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생각했었다.”
https://blog.naver.com/2gafour/221492572335


사실 마지막 문장의 끝 부분에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나의 두 번째 첫사랑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

그렇다. 사실 <배우 하정우>를 처음 알게 된 건, 그의 이름 때문이었다. 하정우는 나에게 배우만을 떠오르게 하는 이름이 아니다. 나의 두 번째 첫사랑의 이름이기도 하다. <배우 하정우>는 심지어 본명이 아니니까, 내가 아는 하정우는 이 세상에 여전히 딱 한 명인 셈이다.

그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짝사랑했던 남학생이다. <배우 하정우>가 책에서 ‘노력의 밀도’라는 표현을 썼는데, ‘감정의 밀도’로 따져보자면 하정우가 나의 첫사랑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두 번째 첫사랑이라 명명한대는 첫 번째 첫사랑을 아예 배제하기에는 나의 마음이 아쉬워서이다.

첫 번째 첫사랑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고, 그때는 온전히 짝사랑은 아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25년 전 초등학교 6학년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2~3학년들보다 훨씬 더 순수했기에 사귀거나 썸은커녕 서로 마주 보고 제대로 된 이야기 한 번 나눠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가 6학년 때, 나는 1반 그는 7반이 되어 쉬는 시간에도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는 육상부였고 잘 달렸고 얼굴이 까맸고 눈이 컸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기똥차게 잘 췄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가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이 나의 남성을 대하는 기준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같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 나는 운동을 즐기는 남자를 좋아하는 편이니까.

다시 두 번째 첫사랑으로 돌아와서, 그는 나와 같은 중학교 동급생이었다. 반은 달랐고, 내 기억으로는 나랑 조금 친했던 남학생의 절친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복도에서 내가 친했던 남학생과 인사할 때 그 옆에 있던 하정우를 자주 봤었다. 사실 이제는 너무 오래전이라, 그의 얼굴도 선명하게 떠오르지가 않고, 내가 그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면을 좋아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마음 하나가 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혼자서만 그에 대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가 고등학교에 가면 고백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 중학교에서는 대부분 그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우리 중학교에서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의 아이들이 다른 학교로 배정을 받았는데 그중의 한 명이 나였다. 그때 받은 충격과 실망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와는 멀어지게 되었고, 나중에 다른 친구를 통해 그가 한 학년 선배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에 대한 마음을 접었었다.

그러다 2008년 영화 추격자를 통해 <배우 하정우>가 뜨면서 10여 년 만에 나의 두 번째 첫사랑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된 <배우 하정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였을까, 원래 내가 알던 하정우는 오히려 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만 갔다.

하지만 그러다 약 2주 전, 새로 일하게 된 곳의 대표실에서 파란색 표지의 ⌜걷는 사람, 하정우」 책을 발견했고,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새삼스럽게 내가 약 20여 년 전 좋아했던 그 하정우는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새삼스레 찾아보거나 알아볼 생각도 없고 방법도 없다. 그냥 궁금할 뿐이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그는 꽤나 있는 집안 자식이었던 것도 같다. 대학생 때 호기심에 그의 싸이월드를 찾아본 적이 있는데, 미국인가 캐나다인가 암튼 영어권 나라로 유학을 간 상태였다. 그리고 그 나이에 차도 있었고, 꽤나 허세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감에 찬 포즈로 찍은 사진 여러 장이 전체공개로 올려져 있었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꽤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그는, 30대 후반의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고 있을까?

     

<배우 하정우>가 쓴 글에서 딱 한 구절만 꼽으라면 아래와 같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것뿐이다. 나는 내가 지나온 여정과 시간에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지만, 결코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확신은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오만과 교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226p)


지금은 그때보다 더 잘 살고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때 나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던 내가 아는 하정우도 자신과 같은 이름을 쓰는 배우가 쓴 이 책을 읽었기를 바란다. 그리고 위의 구절에서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곱씹어볼 수 있는 정신을 지녔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사진을 찍을 때 화려한 자동차에 기대 얼굴을 한껏 치켜 올린 포즈가 아니라 동네 슈퍼 앞에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포즈가 어울리기를 바란다.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하정우야, 너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니? 네가 서 있는 길이 어디든, 네가 어디를 향하든 그 길의 끝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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