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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Nov 10. 2019

나의 공감은 호응이었다는 걸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성장판 온라인 글쓰기 4번째 글

     

10여 년 전.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의 대표님은 직원 교육을 중시하는 분이었다. 그 조직에서 일했던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꽤 많은 교육을 받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교육이 있다. 직급도 직무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엄지 손가락만 한 포스트잇을 나눠 받고 그 포스트잇에 상대방을 떠올렸을 때 딱 떠오르는 키워드를 적어 그 사람의 등에 붙여주는 활동이었다. 넓지 않은 공간을 돌아다니며 내 등을 내어주고 나도 비어있는 등을 찾아 빠른 시간 안에 그 사람과 관련된 키워드를 적고 붙여야 하다 보니 매우 소란스럽고 정신없었던 기억이 난다. 만약 그 활동이 키워드를 붙이는 것에서 끝났다면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의 활동이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내 등에 붙은 포스트잇을 종이에 다 옮긴 후, 그중 8개를 골랐다. 그리고 그 8개를 다시 반으로 나눠 4개는 나눠준 양식의 왼쪽에 4개는 오른쪽에 붙였다. 그 양식은 탁상 달력의 형태로 접을 수 있는 두꺼운 종이였고 왼쪽 칸의 제목은 <현재의 나> 오른쪽 칸의 제목은 <미래의 나>였다.      



그 결과물은 내가 그 조직에서 일하는 내내 모니터 왼쪽 하단에 자리 잡고 있었었다. 그날 같은 공간에 있었던 동료들 중에는 그 활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이유는 내가 받았던 키워드들 때문이다. 소란스러운 가운데도 한 사람에게 한 개 이상의 키워드를 붙여주는 사람들 덕분에 나에게 붙은 포스트잇은 적어도 40개는 넘었던 것 같다. 그중 가장 많이 받은 키워드는, 아니 내 눈에 쏙 들어온 키워드는 “공감”“경청”이었다. 나는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다른 키워드를 붙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감”과 “경청”이 두 개 이상이라는 이유로 양쪽 모두에 두 키워드를 붙였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조직 내에서 “공감적 경청쟁이”로 활동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니 나도 내가 진짜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그렇게 30대를 보냈다. 그 조직을 나온 후에 나는 또 다른 조직에 비슷한 기간 동안 몸을 담았었고, 스스로 더 성장하고픈 욕심만 가지고 다른 조직을 찾아 떠났지만, 거기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나는 아이를 낳았고 키웠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실패도 겪으며 조금씩 더 어른이 되어갔다. 그 사이에 새로 만나 오랜 기간 알고 지내던 지인들 못지않게 친해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은 나를 두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준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해심이 깊다.”, “잘 참는다.” 등 다양한, 하지만 나에게는 비슷하게 와닿았던 평가를 했다. 또 이미 알고 있던 지인들이 나를 만나 대화를 하던 도중 눈물을 쏟는 경우도 꽤 자주 발생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 역시 나는 “공감적 경청의 달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은 어느 순간이 대략 언제부터인지 나는 안다. 바로 글을 쓰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더 깊이 있는 책들을 읽으면서부터이다. 내가 찾아 읽던 책들에서 공감, 연민, 동정, 타인의 고통, 감정 등에 대한 표현이 나올 때면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해왔던 것이 진정한 공감이었을까? 그저 “그랬구나~”에 몇 마디를 더 붙인 것에 지나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타인에게 마음 깊이 연민을 느껴본 적이 있나? 상대방이 울먹이면 나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그저 상대의 상황에 나의 상황을 투영해 스스로를 불쌍히 여겨 나는 눈물이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정말 누군가를 동정해본 적이 있나? 나보다 연약한 아이, 동물,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를 위해 나를 기꺼이 내어준 적이 있나? 타인이 고통받을 때, 내 마음이 함께 진짜로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는가? 그동안 내가 해왔던 것들은 상대방의 말에 대한 즉각적인 호응, 적절한 맞장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공감적 경청”에서 그래도 “경청”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자부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말을 가급적이면 끊지 않고 들어주는 것, 그것도 쉽지 않은 능력이니까. 그리고 그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맞장구를 빠르게 칠 수 있는 것, 그것 역시 아무나 갖출 수 있는 능력은 아니니까. 하지만 역시 이것만 가지고는 내 삶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지금 이 글에 공감하시나요?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시나요? 나의 공감은 호응에 불과했다는 걸 이제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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