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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Dec 29.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이 나에게 준 것 4

 


2019년 3월 4일에 내가 브런치에 올렸던 시. 어느 정도는 설레며 어느 정도는 걱정하며 새롭게 시작했던 일을 아직까지는 하고 있다. 그리고 큰 이변이 없는 한 당분간은 계속하게 될 것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할만해서이다.      


위 시에서 언급했던 전공책은 실은 영어로 된 하드커버의 두꺼운 책은 아니고 『수학의 정석』이다. 나는 학부에서 수학과 경영학을 전공한 후,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으나 쉽게 포기해버리고 IT회사에서 1년 6개월 정도 일하다가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그 후 사회복지 전공을 살려 복지관에서 약 3년, 재단에서 약 3년 총 6여 년을 일하고 사회복지를 더 깊이 공부해보려고 다시 동대학원에 박사과정으로 들어갔다가 내발로 다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약 3여 년의 방황 후, 결국은 학부의 전공을 살려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학원에서 1:다로 가르치는 것과 개별적으로 1:1로 가르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다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 완전히 개인과외는 아니고 회사에 소속이 되어 있어 학생들 모집까지는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작년 9월,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이사를 하게 되어 기존의 학생들과 작별을 하고 새로운 동네에서 새로운 학생들과 다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이제는 함께 수업한 지 1년이 넘어가는 장기회원들도 몇 명 생겼고, 올해 초 재수생 수업을 맡게 되면서 2021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학 영역을 가르쳐보기도 했다.      


이과 출신에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고는 하나 막상 가르치려면 나도 공부를 해야 하기에 도장깨기를 하는 기분으로 중학 수학으로 시작해서, 고등수학, 수I, 수II, 미적분, 확률과 통계까지 하나하나 섭렵을 해 나갔다. 기하와 벡터는 아직 깨지 못했다.      



푸는 문제집이 늘어갈수록, 수학 문제를 푸는 능력이 올라갔고, 그에 따라 나의 급여도 올라갔다. 물론 이 일은 수학 실력 외에 학생, 학부모와의 친화력 및 상담력, 입시에 관한 정보력 등도 더 필요하다. 입시에 관한 정보력은 아직 부족하지만 학생과의 친화력, 학부모와의 상담력 부분에서는 사회복지 전공을 나름 살리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은 공감을 못하겠지만, 나는 수학 문제를 풀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나의 대학 동기 중에 아직 어린아이 둘을 키우느라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하고 전업주부가 된 친구가 있다.  친구가 올해 2, 어느  , 나에게 카톡을 보냈었다.      


요즘 애 키우면서 머리가 돌이 되어가는 거 같아.

책도 읽는데.. 갑자기 며칠 전부터 수학 문제를 막 집중해서 풀고 싶어 졌어.

문제집 사기는 그렇고, 인터넷에서 기출문제 다운로드해서 풀어볼까 하는데 대충 몇 학년 정도 문제를 풀 수 있을까?   

  

그 카톡을 보는 순간, ‘아 얘가 요즘 많이 힘들구나.’ 싶었다.    

  

- 힘든데 수학 문제를 풀고 싶다구요?

- 네, 이과 출신들은 그렇답니다.     


정말 수학 문제를 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 온다. 일반적으로 공감을 얻을 만한 상황이 아닌 걸 알기에 나도 한때 왜 그럴까 고민해본 적이 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인생에는 답이 없는데(혹은 너무 많은데) 수학 문제에는 답이 하나만 있기 때문이다’ 정도이다. 답이 없는 인생이어서 더 스릴 넘치고 더 의미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그 답이 없음에 또는 너무 많은 답들 때문에 내가 있는 곳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고 내가 지금 맞는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 풀이과정은 여러 갈래일지라도 답은 오직 하나인 수학 문제를 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만큼은 ‘내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거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하지만 안 풀리는 문제를 만나면 더 스트레스를 받지 않나요?     


요즘은 내가 공부하던 시절과는 달라서, 문제를 사진 찍어 올리기만 하면 여러 사람의 풀이가 나오는 어플도 있다. 그런 풀이들을 조합해 내가 제일 잘 이해되는, 내가 제일 잘 설명할 수 있는 최적의 풀이와 정답을 찾아내면 얽혀 있던 실타래를 풀었을 때의 딱 그 개운함이 느껴진다.   

  

아직도 어린 학생들이

“수학(공부)을 왜 배워야 해요?”

“수학(공부)을 배워서 어디에 써요?”라고 물어보면 명쾌하게 답을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학생들에게 수학(공부)을 가르쳐줄 수 있어서 좋다.      


이해력이 빠른 학생들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내려고 해 나를 더 자극하고, 이해력이 느린 학생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설명해주기 위해 나를 더 다스린다.      


아직 초3인 내 딸이 앞으로 있을 수많은 수학 시간에 어떤 순서로 어떤 것들을 배워나갈지 미리 알고 있기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한다. 지금은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 교육 과제로 만들다 만 함수의 종류


일차함수 배우고 나면 이차함수, 삼차함수, 그다음엔 유리함수, 무리함수, 지수함수, 로그함수, 삼각함수. 한 고비를 넘어서면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온다는 점에서 인생과 닮았다. 그래서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봐야 한다는 점에서도 인생과 닮았다.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돌고 돌아 결국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어쩌면 나의 운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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