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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Apr 14. 2021

모든 길은 통할 테니까.


제목을 쓰는 순간 딱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년 전, 2008년 여름. 박태환이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400m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던 날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대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캠핑 트레일러를 빌려 1박으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여자 4명이서 참 무모했던 거 같기도 하고 걱정이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그 여행에서도 참 많은 에피소드(순수함의 끝판왕 복숭아 한 박스 에피소드 포함)가 있었지만 오늘은 길과 관련된 것만 털어놓겠다.      



저녁을 먹고 우리끼리 어디론가 가려고 했던 건지 아주 캄캄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운전을 했었는지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지도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어쨌든 시골길이다 보니 내비게이션이 정확하게 안내를 못해 한창 길을 달리는 와중에 “경로가 잘못되어 재탐색합니다.” 하더니 뒤이어 내비게이션 화면에 우리가 가야 할 (빨간)길이 안 보이고 계속 재탐색만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 급기야는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와 같은(다른 멘트였겠지만 그렇게 들렸고 그렇게 기억한다) 황당한 멘트가 나오며 새로운 길을 안내해주지 않았다.  

   

당시 내가 제일 언니였고 나머지는 나보다 2 어린 동생들이었는데, 뒤에 있는 아이들은 무섭다고 우리 어떡하냐고 길을 잃은 거냐고 걱정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주변은 칠흑같이 깜깜했고 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내가 언니니까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괜찮아. 길은  통해.” 하며 동생들을 안심시키고 차를 이동시켰다.  후에 무사히 목적지로 갔겠지. 그러니 지금 다들 별일 없이  살고 있는 거겠지.  여행에  갔던  명을 포함해 우리는 5명이 멤버 , 현재  빼고 모두 아이 2명씩 낳아 키우며  살고 있다( 믿는다).     


 후로 우리끼리 모이면 추억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 가운데 그날의 일은  자주 회자되는 편인그때마다 동생들은 “그때 진짜 언니다!라는  느꼈어.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라며 나를 치켜세워준다. 외동인 내가 그래도  동생들을 만날 때면 아주 가끔 언니미 드러내게 되는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 일부 지역은 한파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기온이 내려갔다고 해서 아침 운동을 살짝 망설였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평소와는 다른 코스로 걷기 시작했다. 집 맞은편 중학교 뒤편에 작은 호수가 하나 있는데, 그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딱 500미터였다. 한 바퀴는 빠르게 걷고 한 바퀴는 뛰고 바로 이어 동산까지 걷다 뛰다 했다.      



출발점이 달라지니 가는 경로 전체가 달라졌다. 가는 경로가 달라지니 풍경도 달라졌다. 원래 가던 길보다는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그런지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마음이 한결 편했다.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다고 하여 마스크도 좀 벗고 숨을 크게 내쉬고 싶었는데, 저 멀리 마주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자주 마스크를 내리고 아예 벗기도 했다. 그렇게 다른 풍경 다른 공기를 느끼며 동산에 오르는데, 얼마 전 내린 비로 촉촉해진 흙이 내 발을 감싸는 그 포근함이 너무 좋았다. 푸른 하늘 아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선명한 초록색의 나뭇잎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바로 옆 공사현장의 소음만 아니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출발할 때 다른 코스로 시작을 하면서 마음속에 아주 조금의 불안감이 있었다. 환한 아침이지만 나는 길치니까 혹시라도 엉뚱한 길로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그래서 계속 걸어가면서도 내가 사는 아파트의 위치를 확인하고 방향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마음보다는 역시 “모든 길은 통하니까.”라는 믿음이 더 컸다. 그래서 오늘 나는 아침 운동의 새로운 코스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 이 코스는 호수 주위를 뛰거나 걷는 양을 내 컨디션에 따라 조절할 수 있으니 더 좋은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히 ⌜북유럽⌟이라는 책소개 프로그램에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이 나온 것을 보게 되었는데, 평소에 호러물을 아예 못 본다는 김은희 작가에서 어떻게 ⌜킹덤⌟ 같은 좀비물을 쓰고 보냐고 물어보니 “제가 써서 이 장면 뒤에 어떤 것이 나올지 이미 알잖아요. 그래서 괜찮아요.”라고 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래, 당장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하나 자세히 또는 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예측이 가능한 것들도 있고, 설사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나의 인생길이 당장은 끊어지지 않고 어떤 쪽으로든 계속 연결이 될 테니까 너무 안달하지 말자.



추신. 운동을 다녀와 씻고 간단 집안일을 한 후 커피를 한잔 내리면서 오늘은 평소보다 오후 일정이 빨리 시작되는 날이라 글쓰기는 내일로 미룰까 또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미루지 말자"는 말을 떠올리며 노트북을 켰다. 한창 글을 쓰는 와중에 카톡이 왔다. "선생님 오늘 수업 30분만 미룰 수 있을까요?" 아, 이런 기특한 학생이 다 있다니. 그럼, 되지. 되고 말고. (마침 다른 요일에 좀 여유가 있어 오늘 못하는 30분은 그날 보충하면 되니까) 늘어난 30분의 혼자만의 시간 덕분에 글을 마무리하고 오늘 오전의 할 일을 완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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