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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Sep 27. 2021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

드라마 <인간실격>을 보다가

오랜만에 걸었다. 그리고 글을 쓴다.

오랜만에 걸었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글을 쓴다. 왜냐하면 오랜만에 걸었기 때문이다.


    

처음 두 문장을 무엇으로 할지 정하지 못한 채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있다. 사실 처음 두 문장만 모르는 것은 아니다. 드문드문 이 단어, 이 구절, 이 에피소드를 넣어야지 정도는 걸으면서 문득문득 생각해두었지만 전체적인 내용, 흐름, 메시지 따위는 정하지 못했다. 아마 이것이 나의 글쓰기의 한계인 것 같다. 알고 있지만, 딱히 나아지지 않는 그 부분.    

  

러닝화를 신발장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꺼내어 신는 게 귀찮아서 그냥 현관에 나와 있는 운동화를 신고 나섰다. 구입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질이 덜 난 운동화다. 처음 1~2km 정도까지는 걸을만했다. 어차피 오늘은 뛸 생각은 없었다(금요일에 코로나 백신을 맞은 몸이라 스스로 무리하지 않는 차원에서). 그냥 걷는 건데도 반환점에 가까워지자 오른쪽 발의 몇 부분에 쓰라림이 느껴졌다. 새 신발과 맨살이 반복적으로 닿아 생기는 약간의 살까짐 현상.      


그때 문득  말이 떠올랐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  드라마나 , 아니면 일상 대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말이긴 한대,  와닿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순간 어제  드라마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보통 책 한두 권을 같은 시기에 읽는 편이다. 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는 경우도 있지만 A를 읽다가 좀 지겨워지면 B를 읽다가 다시 A를 읽는 그런 식. 싫증을 잘 내는 나의 성격에 스스로 적응한 경우라고나 할까. 드라마를 볼 때도 비슷하다. 정말 재밌어서 1화부터 마지막화까지 하루 이틀 만에 끝내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두세 편의 드라마를 돌려가며 보는 편이다. 최근에는 <오징어게임>, <인간실격>, <워킹맘 다이어리>를 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오징어 게임>은 재밌어서 이미 다 봤고, <인간실격>은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라 보고 있고, <워킹맘 다이어리>는 시즌제 드라마로 시즌 4까지는 이미 다 봤고, 어제부터 시즌 5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말한 위 3개의 드라마 중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어.”와 부합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징어 게임>을 본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그 드라마를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인간실격>이다.   


   

<인간실격>은 만약 내가 드라마가 종영된 후 나만의 기준으로 다시보기를 결정할 때 접했다면 보지 않았을 드라마다. 내가 다시보기를 결정하는 기준은 기본적으로 배우들, 그리고 시청률이다. 시청률이 처음 시작보다 갈수록 소폭이라도 상승하는 드라마는 배우들이 마음에 들면 보는 편이다. 그러나 인간실격은 현재 8회까지 방영되었는데 원래도 높지 않았던 시청률이(첫회 4.2%) 갈수록 하락해 7회에 1.4%라는 현재까지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요즘은 시청률로만 드라마를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시청률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시작할 때부터 봐버렸고, 배우들의 연기야 말할 것 없이 좋아서 어려운 대사들을 곱씹으며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여백을 견디며 그야말로 천천히 보는 중이다.      


7회에 부정(전도연)과 강재(류준열)의 모텔씬이 있다. 뭐 이렇게만 말하면 모텔 했을 때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그렇고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아 그렇고 그런 드라마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뻔한 모텔씬은 아니다. 그냥 옷 입은 채로 한 침대에 등 돌리고 누워 잠만 잔다. ‘손만 잡고 잘게’도 아니고 정말 ‘잠만 잘게’다. 부정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한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서 강재에게 역할대행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날 그 둘은 같은 마음을 주고받는다. 부정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냥 앉아있고 싶다고 했고, 강재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었고 엄마와 있으면서도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그 두 마음이 같은 마음이라는 걸(심장에 이상하게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마음) 서로가 확인했다.


https://blog.naver.com/dushess77/222517479928


나는 그 장면에서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라고 느꼈다.      


내 마음을 딱 알아주는 누군가, 그게 누구라도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어찌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을 쓰고 잠시 감상에 젖을 뻔하다 그러기엔 너무 월요일 오전이라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 사람의 마음을 딱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준 적 있는가. 한 번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한 순간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너도 나도 결국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보니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고층 아파트(높은 빌딩)와 저 멀리 푸른 산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 말 그대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 앉은자리에서 고개만 잠깐 돌려도 이런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내가 일부러 움직이지 않으면 앉은자리에서 대부분의 업무가 가능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남은 2021년을, 앞으로 3년, 5년 그 이상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그나저나 <오징어게임>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히 써보도록 하고 마지막에 1번 참가자(깐부)가 죽기 전에 남긴 말만 남겨보겠다.    


  

“돈이 너무 많은 사람과 돈이 너무 없는 사람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뭘 해도 다 시시해.”     


나는 돈이 너무 많은 적은 아직까지는 없고 돈이 너무 없은 적도 뭐 거의 없는데 왜 벌써 재미가 없어지려고 하는 걸까? 그것 또한 다 마찬가지인가. 어차피 사는 게 다 그런 건가? 재미를 느끼려면 나도 게임의 참여자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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