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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an 30. 2019

넌 나의 '에메르베유망'이야.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읽고


넌 나의

‘에메르베유망’

이야.


     

프랑스, 파리, 에펠탑, 샹제리제 거리...

     

많은 이들에게 이 단어들은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의 대명사 또는 일생 동안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를 다녀온 사람들 중에는 불쾌한 기억만을 간직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죽하면 파리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 ‘파리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피해망상이나 우울증 등을 겪는 적응장애를 일컫는 ‘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나는 10여 년 전, 스페인을 갈 때 프랑스를 경유한 적이 있었고, 그것이 유일한 프랑스 경험이다. 그 때, 샤를드골 공항에서 2~3시간 정도 머물렀던 것이 전부이지만, 프랑스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게 된 일이 있었다. 환승 전까지 남는 시간 동안 Tax Refund 관련 문의를 하고 싶어 안내데스크를 찾았고,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영어로 질문을 했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고압적인 표정과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였다. 나는 한번 더 최대한 공손하게 그리고 최대한 정확한 발음으로 “I want to....Which way to the.....?”라고 물어봤지만 역시나 돌아온 건 짤막한 프랑스어와 손짓뿐이었다. 프랑스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1도 모르지만 느낌상 프랑스어로 물어봐야만 대답해 줄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솔직히 그 때 당시 나는 불쾌한 기분 못지않게 놀라운 기분을 느꼈었다. 샤를드골 공항은 국제공항 아닌가? 만약 그 곳이 프랑스 어느 도시의 식당이나 마켓이었다면, 프랑스인들이 모국어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강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인들이 드나드는 국제공항에서조차 프랑스어만을 취급한다는 경험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나의 프랑스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고, 그 이후로 살면서 프랑스를 갈 일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딱히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작년 여름에 마카오에서 실제 에펠탑 크기의 1/2로 축소해놓은 가짜 에펠탑을 보게 되었다. 가짜였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훨씬 아름다웠다. 그 가짜 에펠탑을 보면서 처음으로 실제 에펠탑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실제는 얼마나 더 크고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10년 전, 샤를드골 공항에서의 기억이 희미해져 갈 무렵 프랑스, 파리, 에펠탑, 샹제리제 거리와 같은 단어들이 내 마음 속에 조금씩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내 의식 속에 ‘에메르베유망’이라는 프랑스어가 말 그대로 꽂히면서 이제 나의 소원 중의 하나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에펠탑을 보며 ‘에메르베유망’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해보고 싶다‘가 되었다.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라는 소설이다.   

     

그는 딸아이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준다. 딸을 어깨 위로 번쩍 들어 흔들어 준다. 딸에게, 넌 아빠의 에메르베유망(‘경탄할 만한 것’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한다. 절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100만 년 동안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1권, 54p)

     

이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지 한 달이 훨씬 지난 아직까지도 소설을 읽는 동안의 그 떨림, 감동, 충격, 아픔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최고이지만, 소설 속 한 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에메르베유망’이다. 이 단어를 통해 왜 프랑스인들이 그렇게 모국어를 사랑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더불어 소설 속 인물이기는 하지만 마리로르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느끼며 내 자신을 많이 반성하기도 했다. 과연 나는 나를, 그리고 내 주변의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과연 그 존재 자체로 오롯이 받아들이고,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내가 기분이 좋거나 그 사람이 나를 기쁘게 해 줄 때에만 “넌 나의 에메르베유망이야.”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는 않았는지.     

     

그에겐 자부심도 있었다. 혼자서 딸을 키워 냈다는 자부심. 그의 딸은 호기심이 왕성하고, 좀처럼 굴하지 않는다는 자부심. 이토록 올찬 아이의 아버지라는 겸손한 마음, 마치 자신은 다른 더 대단한 존재에게 가까스로나마 물을 대 주는 비좁은 도관이라도 된 것 같은 심정. 무릎 꿇고 앉아서 딸의 머리를 헹궈 주고 있는 이 순간의 감정이 그렇다고 그는 생각한다. 마치 딸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의 몸이 버틸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 버리는 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사방 벽이, 아니, 도시 전체가 무너져 버려도, 이 감정의 빛은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1권, 285-286p)


과연 나는 누군가를 마리로르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온 몸을 다 바쳐 사랑한 적이 있는지. 나는 그런 적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조금만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안겨주면 그 사람을 욕하거나 미워하거나 짜증스럽게 여긴 적은 없는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만이라도 돌아보고, 뉘우치고, 인식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지금, 여기 이 곳에서만큼은 순도 100%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내 자신이어서, 이런 나라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의 ‘에메르베유망’이 내 옆에 곤히 잠들어 있다. 혹시나 깰까 조심하며, 규칙적인 숨소리에 안도하며, 문득문득 뒤척이며 닿는 따뜻한 손에 가만히 내 몸의 일부를 내어주며,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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