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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Dec 02. 2021

아끼는 게 꼭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말없이 우리는 남은 국수를 먹었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 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 ⌜작별하지 않는다⌟, 75p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 중이다. 지난 주말 아이와 스타필드에 갔다가 서점에 들러 시간을 보내던 중 눈에 들어온 책. 이미 인터넷 도서 구매 사이트 장바구니에 담겨 있어 조만간 다른 책들과 함께 구매할 책이었지만 먼저 사기로 했다.      


  


아직 다 읽지 못했다. 1/4 정도가 남았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무엇이라도 쓰고 싶어서 노트북을 열었다.    

  

읽고 걷고 쓰고, 그 루틴을 자주 실행하기에 어려운 계절이 되어버렸다. 걷기에는 춥다. 걷는 게 줄어든 그 자리와 그 시간에 읽기를 채워 넣어야지.      


그런데 최근에 어쩌다 보니 읽는 것에도 소홀해졌다. 나에게 읽는 것은 input, 쓰는 것은 output, 걷는 것은 인풋을 아웃풋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예열의 과정과도 같다.      



50여 년 전, 고등학교 동창으로 만나 20대 중반 결혼 후, 40년 이상을 함께 살고 있는 부모님의 대화 중에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엄마 : 말을 하면 좀 반응을 하고, 실행을 해.

아빠 : 인풋은 되는데 아웃풋이 안돼.     


그런 대화를 들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과연 인풋은 제대로 되고 있는 걸까? 들어갔는데 나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빠에게는 이것이 최대의 아웃풋인 것은 아닐까? 등등  

   

그런 아빠가 자주 하는 말은 당연히, 꼭 말로 해야 아나~이다.

그럼 엄마는 또 당연히, 말을 해야 알지 안 하면 어떻게 알아?이다.     


 

50여 년을 알고 같이 살아가는데도 여전히 그 차이는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더 벌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를 위해 엄마는 그리고 아빠도 아빠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자식인 나는 그저 큰 탈 없이 앞으로 더 오래오래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말을 잘 아끼는 편이다.      


20대 초반, 같은 대학교 동기 중에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반수를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친구가 나에게는 그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그때 나에게 “다른 애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고 했었다. 나는 절대 말을 안 했고, 그 친구는 나름 반수에 성공해 다른 학교 다른 과로 가게 되었고 지금은 변호사로 살고 있다. 학교를 옮기기로 하고 가졌던 술자리에서 나 빼고 다른 친구들이 다 놀랐었다. 반수 했던 친구는 내가 진짜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다른 친구들은 감쪽같이 숨기고 반수에 성공한 그 친구에게 놀라고. 그때 다들 나에게 “야 너 입 진짜 무겁다.” 했었다.     


비슷한 일화들이 꽤 여러 개 된다.      


결혼 초, 남편과 약속한 것 중에 ‘아이 앞에서는 절대 싸우지 말자’가 있었다. 대체적으로 저 약속은 잘한 거 같긴 한대 가끔은 둘 다 약속을 참 잘 지켜 오히려 둘 사이에 할 말이 너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저 약속을 한 이유는 당연히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을 것인데, 싫은 말만 아이 앞에서 안 하면 될 것을 아무 감정이 안 섞인 말도 나아가 좋은 말까지도 아끼게 된 것 같다.      


어제도 내 딴에는 걱정되어서 카톡으로 보낸 메시지를 남편이 오해해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내가 전화상으로 남편과 작은 다툼을 하는 것을 거실에 있던 딸이 들었는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조금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남편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결혼 초 했던 저 약속은 이제는 좀 깨고 싶다. 딸도 어느 정도 컸고 대화가 없는 것보다는 혹여 감정이 상하더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상한 감정이 있다면 그것을 들여다봐주기도 하고, 그래도 안 풀린다면 풀릴 때까지 노력도 하고 그래야 더 끈끈해질 것 같다.     

       

하지만 나부터 자신이 없다. 과연 내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확신이 안 선다. 글로 쓴 이 말이 진짜 내 생각인지. 이 공간조차도 이제는 나를 오롯이 끄집어낼 공간이 아닌 게 되어버린 건지.     

  

무딘 칼로 안구 안쪽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나는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댄다.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 ⌜작별하지 않는다⌟, 120p     


칼로 도려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편두통이 있었는데, 어느덧 그 통증이 사라졌다. 역시 나를 제일 잘 아는 건 나인가 보다. 내 두통의 치료약은 글쓰기가 될 것이라는 나의 처방은 틀리지 않았다.      



위에 쓴 내 글이 100%가 아니더라도, 확실한 것이 아니더라도, 50%만 넘어도 높은 확률로 봐야겠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수학 ⌜평균과 가능성⌟이라는 단원에 “불가능하다-아닐 것 같다-반반이다-일 것 같다-확실하다”로 가능성을 표현하는 내용이 나온다. 불가능하다를 쓰는 예로는 “빨간색 공이 5개가 들어있는 주머니에서 1개의 공을 꺼냈는데 파란색일 것이다.” 또는 “3월 2일 다음날은 3월 1일일 것이다.”와 같은 것이 자주 나오고, 확실하다를 쓰는 예로는 “올해 12살인 세영이는 내년에 13살이 될 것이다.” 또는 “계산기에 ‘2+3=’을 누르면 5가 나올 것이다.” 등이다.        


사람의 마음은, 감정은, 생각은 이렇게 수학적으로 불확실하거나 확실한 문장들로만 쓰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 앞으로는 상대방이 오해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금 더 자세히 조금 더 다정히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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